일본, 임오군란 빌미 울릉도 요구…청 개입으로 모면

길윤형 기자 2024. 4. 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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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5

지독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1년 넘게 월급을 못 받던 구식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임오군란이 시작된 것은 민씨 척족의 부패 때문이었고, 나라를 거덜 낸 참사로 커진 것은 대원군의 권력욕 탓이었다. 청의 개입으로 울릉도 할양 등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흥선대원군(1821~1898)은 임오군란을 틈타 민씨 척족이 이끄는 정권을 쓰러뜨리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분노를 활용해 친형 이최응, 척신 민겸호·김보현을 살해하고, 주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명성왕후가 죽었다고 선포했다. 그의 정국 대응은 민심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었지만, 국제정세에 어두워 조선에 더 큰 화를 불러올 뻔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882년은 비가 내리지 않는 해였다. 고종은 6월2일(음력 4월17일) “농사를 생각하면 몹시 걱정스럽다”며 기우제를 명했다. 이틀 뒤인 4일 서울의 삼각산·목멱산·한강, 7일엔 용산강 저자도에서 하늘에 빌었는데도 비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지독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1년 넘게 월급을 못 받던 구식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영의정 홍순목은 7월19일 고종에게 훈련도감 군졸들이 전날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달 분을 준 게 이와 같은가”라고 분노하며 “(창)고지기를 구타”했다고 보고했다. 국고가 거덜 난 것은 왕실의 사치와 민씨 척족들의 부패 때문이었다. 황헌은 ‘매천야록’에서 “양전(兩殿·고종과 명성왕후)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써 1년도 안 돼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났다”고 적었다.

이 ‘적폐’의 핵심이자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1838~1882)는 가혹하게 대응했다. 창고지기를 때린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을 잡아넣고 사형시키려 했다. 참다못한 가족들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곳곳에 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달 전 5월 미국 등 서양 열강들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개방의 첫발을 내디딘 조선의 통치체계를 사실상 마비시킨 임오군란이라는 대참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성난 병사들에 빈민들까지 가세해 23일 민겸호의 자택으로 몰려가 난동을 피웠다. 홧김에 저지른 일이지만, 당대 최고 권력자의 집을 부쉈으니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이들은 민씨 척족에 맞설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정치적 대항마’인 흥선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대원군과 도시 빈민들을 잇는 ‘정치적 고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민씨 척족을 제거하고 개항 이후 조선 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는 일본 세력을 말소하는 것이었다.

실제 조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무관세 무역’이 시작되며 조선 경제는 큰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흘러나가는 쌀은 개항 이듬해인 1877년 474석에서 1880년 9만3288석으로 늘었다. 게다가 1882년엔 가뭄이 이어지며 쌀값이 크게 올랐다. 9월엔 인천 개항까지 예정돼 조선 민중들의 불만·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대원군을 만난 뒤 병사들은 무기를 탈취해 민씨 척족의 집과 당시 서대문 밖에 있던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이튿날인 24일엔 창덕궁에까지 난입해 명성왕후를 죽이려 했다. 대원군은 며느리가 얼마나 싫었던지 주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왕비가 죽었다며 국장을 선포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1917) 주조선 일본공사는 임오군란의 난리통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조선에 가혹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재정적으로 궁핍한 조선에게 무려 50만엔이나 되는 배상금을 요구한 것에 대해선 일본 내에서도 뒷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제물포 조약 체결 사실을 알리는 이노우에 가오우 외무경에게 보내는 1882년 9월2일 보고서에서 이유원과 김홍집을 상대로 “담판을 열어 마침내 30일 대만족할 만한 조약을 체결했다”고 전했다. 일본국회도서관 제공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1917) 주한 일본공사가 변란을 알게 된 때는 일요일이던 23일 오후 3시께였다. 군중들과 대치하던 하나부사는 24일 새벽 공사관을 탈출해 제물포에 닿았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 26일 인근 해역에서 영국 측량함 플라잉 피시호에 구조됐다. 가까스로 29일 나가사키에 도착해 공사관 습격 소식을 도쿄에 타전했다.

급전은 30일 새벽 0시30분 외무성에 도착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이튿날 긴급 각의를 열어 조선에 대한 요구 사항을 결정했다. 140여년이 지난 지금 살펴봐도 눈이 아플 만큼 가혹한 요구가 담긴 이 훈령은 일본외교문서 15권(1882년치) 226~229쪽에 담겨 있다. 일본은 △공식 사죄 △피해·유족에 대한 배·보상 △주동자 체포·처벌을 넘어 △피해·소모군비 배상 △조선 정부의 책임이 클 경우 거제도 또는 송도(松島·울릉도)의 할양까지 요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또 조선이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해 인천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구마모토에 배치된 1개 대대 병력을 곤고·히에·기요테루·닛신 등 4척의 군함과 3척의 운송선에 실어 조선에 파견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전시 혼성여단을 편성한 뒤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출병할 수 있도록 후쿠오카에 대기시켰다. 부패에 맞선 군인들의 자연발생적인 폭동이 대원군의 권력욕과 결합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국제 분쟁’으로 커진 셈이었다. 단순한 분쟁이 아니라 울릉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참혹한 국난이 되어 조선의 발등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조-청의 ‘유사 동맹’이 기능했다. 리수창(여서창) 주일 청국공사는 8월1일 본국에 서울에서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이튿날엔 일본이 조선에 출병했다고 전했다. 리훙장(이홍장)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이 모친상으로 자리를 비운 터라 장수셩(장수성) 서리가 대응을 맡았다.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해 조선에 파견된 마건충(1845~1900)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두 나라가 무력 충돌 없이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도록 도왔다. 그는 조선의 부대표로 나선 김홍집에 대해 “조선에서 시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을 남겼다. 마건충은 전쟁도 하지 않았는데 군사비용을 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 일이라며 손해금 요구는 절대 수용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하나부사의 강경한 요구에 밀린 김홍집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때마침 톈진에는 조선의 영선사 김윤식(1835~1922)과 훗날 조선을 대표하는 재무 관료로 이름을 얻게 되는 문의관 어윤중(1848~1896)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개방이 필요하다는 점에선 고종·명성왕후와 의견이 같았던 ‘온건 개화파’들이었다. 다시 ‘쇄국시대’로 돌아갈 순 없는 법이었다. 이 사태가 대원군의 소행임을 직감한 이들은 “중국은 속히 군함 몇척을 파견해 육군 1000명을 싣고 밤을 새워서라도 동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수성은 외교 전문가인 마젠중(마건충·1845~1900)과 통령북양수사 딩루창(정여창) 등을 서둘러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을 실은 청의 군함 위원·초용·양위는 10일 밤 인천에 도착했다. 사태를 파악한 마건충은 조선을 이대로 두면 “하나부사와 이노우에가 군함을 거느리고 한강에 크게 모일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조선이 반드시 모진 해독을 입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일본의 세력이 강해져 청의 종주권이 약화하리라는 우려였다. 이윽고 광동수사제독 우창칭(오장경)이 지휘하는 대규모 병력이 20일 남양부 마산포에 도착했다. 청과 일본의 군함이 맞선 제물포엔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경한 요구안을 품에 안고 조선에 돌아온 하나부사는 16일 호위병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해 20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고종과 만났다. 그는 이날 조선에 △유족·부상자에게 5만엔 위로금 지급 △일본의 손해 및 출병 준비 비용 배상 등 8가지를 요구했다. 회답 기한은 ‘사흘’ 뒤인 23일 정오로 못 박았다. 조선이 21일 회담 연기를 요청하자 바로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청의 군대가 신속히 도착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인천을 점령한 뒤 울릉도·거제도의 할양을 요구했을지 모른다.

대원군으로부터 일본이 ‘최후통첩’을 해왔다는 전갈을 받은 마건충은 8월 뙤약볕 아래서 서둘러 움직였다. 청-일의 ‘비공식 회담’은 24일 인천에서 진행됐다. 이 기막힌 만남은 마건충이 쓴 ‘동행삼록’(東行三錄, 김종학 ‘흥선대원군 평전’에서 재인용)에 기록돼 있다. 그는 하나부사에게 쿠데타를 곧 진압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조선 국왕과 그 신하들은 일본 공사와 상의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정권을 잡은 것은 국왕이 아니라 집정(대원군)일 뿐이다. (중략) 부디 양찰하기 바란다.” 말귀를 알아들은 하나부사는 이튿날 “오늘 내일 중에 (조선의) 전권 대신을 인천에 파견하게 한다면 협상 재개도 굳이 사절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났다. 가랑비가 내리던 26일 저녁 대원군은 납치돼 청의 바오딩으로 압송된다.

청의 개입으로 대원군이 제거된 뒤 조-일 협상이 시작됐다. 봉조하 이유원을 전권대신, 호조참판 김홍집을 부대신으로 하는 조선 대표단이 서둘러 제물포로 향했다. 이들은 28일 밤 10시 일본 군함 히에에서 하나부사와 회담을 시작했다. 사흘간 회담 끝에 30일 제물포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강경한 요구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조선은 무려 50만엔에 달하는 손해금(4관)과 공사관 경비를 위한 ‘약간의 군사 주둔’(5관)이란 요구를 받아들였다. 조선이 매년 일본에 지급하게 된 10만엔은 당시 조선 세입의 7%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일본의 압박에 굴복한 김홍집은 마건충에게 편지를 보내 “부끄럽고 원통해 죽고 싶다”(慚恨欲死)고 적었다. 임오군란이 시작된 것은 민씨 척족의 부패 때문이었고, 나라를 거덜 낸 참사로 커진 것은 대원군의 권력욕 탓이었다. 청의 개입으로 울릉도 할양 등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 사태 전개에 가장 큰 고통을 느낀 이는 왕권이 제약되게 된 고종이었다. 청이 종주국임을 내세워 하루아침에 대원군을 납치할 수 있다면, 고종 폐위 역시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빈틈을 타고 ‘자주 조선’을 내세운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갑신정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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