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다 죽어"…도 넘은 경쟁에 여의도 '곡소리'

신민경 2024. 4. 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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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치달은 운용사 '저보수 경쟁'
동일 이름, 동일 콘셉트로
보수만 확 낮춰 상장
견제구 용도로 ETF 내는 사례 속속
점유율 자존심에 극에 달한 저보수 경쟁
1분기 BEP 맞춘 운용사 4곳
"당장 5년 뒤가 안 그려진다" 업계 불안
"상식적인 선에서 경쟁해야"
여의도 증권·운용가 모습. 사진=한경DB

"이 상품으로는 돈 벌 생각 없다고 선전포고를 한 셈이죠. 미래에셋에만 타격을 입히면 된다는 뜻 아닐까요."(A 자산운용사 관계자)

상장지수펀드(ETF)가 나올 때마다 '미투상품'·'저보수'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신한자산운용의 선공으로 '신한-미래에셋 간 전쟁'이 발발할 분위기다. 다음 달 상장 예정인 신한운용의 ETF가 미래에셋의 상품명과 동일한데다 보수를 확 깎았기 때문이다. 시장 안팎에서는 운용업계의 베끼기와 보복성 출시가 도를 넘었다고 보고 있다.

3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신한운용은 다음 달 말 '신한 SOL 미국테크TOP10' ETF의 정방향과 인버스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이는 2021년 4월 상장한 미래에셋운용의 'TIGER 미국테크TOP10 INDXX’와 상품명이 동일하다. TIGER 미국테크TOP10 INDXX는 해외를 기초시장으로 한 국내 ETF 중 네 번째로 순자산총액(1조9110억원)이 큰 인기 상품이다.

신한운용은 여기에서 보수를 10분의 1수준으로 확 낮췄다. 미래에셋운용 상품의 총보수는 49bp(0.49%)이지만 신한운용 상품은 5bp(0.05%)에 불과하다. 수탁고를 1000억원까지 불려도 운용사가 받는 보수가 5000만원에 불과한 셈이다. 운용역 한 명의 인건비도 안 될 만큼의 저마진이다.

이를 두고 미래에셋운용은 '보복성 출시'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미래에셋운용 한 관계자는 "3년 전에 낸 상품을 갖다가 조금의 변형도 없이 그대로 낸 데다 '버퍼형'(하방 방어)인 것도 베꼈다"며 "이게 보복성이 아니면 무엇이냐"라고 말했다.

미래에셋과 신한운용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쟁'을 처음 촉발한 주체는 미래에셋운용이었다. 신한운용은 2022년 국내 첫 월 배당 테마인 'SOL 미국배당다우존스'를 내놓았는데 이를 미래에셋이 그대로 베껴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를 출시했다. 이듬해에는 신한운용이 2차전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ETF를 첫 출시했는데 미래에셋과 삼성도 세 달 만에 유사 콘셉트로 상장했다. 당시 신한운용은 "운용업계 1~2위인 미래에셋·삼성이 중소 운용사의 상품을 베끼게 되면, 기존 상품이 무력화된다"며 항의한 바 있다.

모 운용사 직원의 모습 자료사진. 사진=신민경 기자


이후 운용사들은 유사상품의 범람 속에서 '저보수'로 승부를 봐 왔다. 대표적인 게 미 대표지수 월 배당 ETF다. 신한운용을 시작으로 월 배당 상품이 주목받으면서 미래에셋도 월 배당을 내놓았고 기존에 유사상품을 상장했던 한국투자신탁운용도 기존 분기 배당을 월 배당으로 바꿨다. 이후 각사의 치열한 접전 끝에 네 회사 상품의 총보수는 시장 최저 수준인 0.01%로 통일됐다.

최근에는 삼성자산운용이 미국 대표지수인 S&P500과 나스닥에 투자하는 ETF 4종의 보수를 0.0099%로 내려 화제를 모았다. 이는 국내 상장한 전체 ETF 가운데 최저 수준의 보수다. 이 역시 유사상품 중 순자산 기준 압도적으로 선두인 미래에셋운용을 제치기 위한 초강수다. 시장은 업계 1위 운용사가 채권형도 아닌 미국 대표지수형 상품의 ETF를 크게 내렸다며 반발하는 중이다.

이처럼 운용사들 보수 경쟁이 격화한 가운데 시장 안팎에서는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점유율에 치중한 저보수 출혈 경쟁을 넘어 업계 간 감정싸움으로 비화해 보복성 상품 출시까지 번지고 있어서다.

업계에 확인한 결과 올 1분기 기준(추정치) ETF 사업부에서 손익분기점(BEP)을 넘긴 운용사는 운용사 총 26곳 중 삼성·미래에셋·한투·KB자산운용 등 네 곳뿐이다. 마케팅비 등 회사가 들이는 비용이 저마다 다르긴 해도 통상 ETF 수탁고 BEP 기준은 약 10조원이다. 즉 이들을 제외한 상당수 운용사들이 적자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최저 수준인 보수가 계속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대로라면 상위 몇 곳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업을 접게 될 것이란 전망이 짙다. 중형 운용사 한 임원은 "길게 안 봐도 된다. 5년만 지나도 우리를 비롯해 수많은 운용사들이 ETF 사업을 정리할 것"이라며 "브랜드 인지도에서도 밀리는데 0에 수렴해 가는 보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낮은 보수는 소비자들에게는 장점이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악순환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또 다른 중형 운용사 한 운용역은 "회사들이 시장에서 발을 빼면 그만큼 상품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경쟁 촉진이 안 되니 혁신성도 뒤처질 수 있다"며 "일부 상품들은 소수 회사가 독점하면서 높은 수준의 보수가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대형 운용사 한 직원은 "사실상 각 그룹 수장들의 자존심 대결에 임직원들만 죽어나는 상황이다. 운용사 대표마저 성과지표(KPI)가 시장 점유율 확대일 정도로 그룹 전사 목표에 임직원 모두가 시달리고 있다"며 "지금의 저보수 경쟁이 극에 달하는 것을 막으려면 리더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 한 관계자도 "시장 개입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어 거래소가 나서서 업계 보수를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며 "상품을 내는 목적은 소비자를 위함이어야 하지, 경쟁사를 제치거나 견제하기 위함이어선 안 된다. ETF가 운용가 장기 먹거리인 만큼 서로 상식적인 선에서 경쟁을 벌였으면 한다"고 밝혔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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