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와이드] "박정희 동상보다는···" 복원 첫 삽 뜬 전태일 열사 옛집

이태우 2024. 4. 3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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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사회 약자에 대한 연민'···남산동 옛집 복원으로 대구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어야"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대구의 옛집을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 5년 만에 첫 삽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의 고향은 대구인데, 중구 남산동에 있는 옛집은 열사의 행복했던 시절이 담긴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 2019년과 2020년에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는 대구 시민들이 모금을 통해 옛집을 사들였지만, 복원 비용이 부족해 착공이 미뤄지다가 5년 만에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송필경 (사)전태일의 친구들 이사장 모시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과 대구 옛집 복원의 의미에 대해 들어봅니다.

[김상호 사회자]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열사의 옛집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오늘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과 옛집 복원의 의미에 관해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예, 고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이사장님, 전태일 열사의 집 복원 소식은 저희가 예전에도 한 번 전해드린 것 같은데요. 벌써 집 복원이 추진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추진 4년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러니까 5년 만이죠. 이제 5년째 접어드는 해인데 2024년 드디어 첫 사업을 뜨게 되었는데, 전태일 열사의 집을 복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우리 전태일 열사와 대구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소개를 좀 해 주시죠.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총각 어디 출신이냐?' 물으면 항상 '대구 사람 전태일'이라고 했을 정도로 대구에 자부심이 많았습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좀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 실패해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부산으로 이사 가서 거기서 한 4년 살다가 1954년부터는 거의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살면서,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서울에서도 거의 비렁뱅이 수준이었어요. 때로는 걸식하고 구두 닦기도 하고 신문팔이도 하고 그렇게 입에 풀칠하고, 또 사는 집은 거의 천막촌에 살았습니다. 또 천막촌이 없을 때는 천막과 천막 사이에 거적을 깔고 그렇게 살기도까지 했습니다. 헛간에 셋방살이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 1962년 8월부터 1964년 2월까지 지금 우리가 관찰되는 대구 남산동 집에 2평짜리 셋방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명덕초등학교 거기에서 야간국민학교,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생활 하다 보니 국민학교 2년도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제 하고 난 뒤에 여기에서 떠나서 1964년도 서울 가서 거기에서 또 비렁뱅이 생활하다가 65년도에 평화시장에 드디어 직업을 얻어서 갔습니다. 그 뒤에는 쌍문동, 마지막까지는 그 쌍문동 공동묘지 터 천막촌에 살다가 벽돌, 브로커 벽돌집에 무허가로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우리가 흔히 전태일 열사 하면 잘 모르시는 분들은 대구와 인연을 연결하다 보면, 평화시장, 서울 평화시장, 그다음에 청계천, 창신동, 이렇게 재단사로 일하던 그곳 이렇게 보통 연결을 많이 시키는데, 생각보다는 대구에 대해서 이렇게 인연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구에서 이런 기념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그런 점에서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좀 이따 잠깐 말씀을 또 듣기로 하고요,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곳 '전태일의친구들' 재단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이사장님께서 전태일의친구들이라는 이 사단법인이 어떤 곳이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기념 사업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소개를 먼저 좀 해 주시죠.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거의 뭐 비렁뱅이 생활하다 보니까 삶의 흔적들이 재개발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완전히. 자기 사업장인 평화시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대구에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전태일 정신을 복원하려면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전태일이가 왜 대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느냐 바로 그 의미가 전태일의 정신입니다. 그걸 갖다가 우리가 보존하고 또 유일한 삶터를 보존하는 것이 전태일의친구들의 지금 사업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자발적으로 지역에 있는 분들이 뜻을 같이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처음에 사단법인 발기인으로 처음에 모이셔서 회원들도 모집하시고 해서 그 기금으로 운용되는군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그렇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다음에 다른 어떤, 이런 옛집 복원 사업을 하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셨을 텐데···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사업은 지금 현재는 순수하게 시민 헌금으로만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회원이 몇 분이나 되시죠?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우리가 성금을 내주신 분은 3,300여 명이나 되고 우리 지금 회원은 한 120~130명, 그리고 우리가 이사진 운영진은 13명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특별한 인연이 있으셔서 전태일 열사의 집 복원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시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이사장님이 '왜 전태일인가'라는 책도 쓰시고 책 수익금 전부 다 재단 기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본업은 또 치과의사시라고요? 그래서 더 이렇게 궁금해지는데요. 치과의사시고 본업을 진행하시는 중에 왜 전태일 열사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각별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런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제가 70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 1970년대에는 민주화 요구가 굉장히 거셌습니다. 그래서 대학 다니면서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됐고, 또 1970년이니까 저는 전태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당시에 몰랐지만 1980년대 사회생활을 들어가고 또 개업하면서 제가 시민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시민 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전태일이가 우리나라의 민주화 발전에 아주 커다란 공헌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전태일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게 계기가 돼서 본격적으로 다른 사업보다는 전태일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에 좀 더 치중하고 집중하셔서 지금 전태일의친구들이라는 이 재단도 이끌고 계신 것 같은데, 방금 말씀을 주셨습니다만,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우리 노동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름이고, 전태일 열사가 이후에 남긴 게 매우 많다고 말씀을 주셨는데, 당시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그때 시대상 짐작할 수 있는 거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그래서 뒤에 제가 전태열 책을 보면서 알게 되는 건데 전태일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살았습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집도 없이 길가에서 걸식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까 취직하게 돼서, 16살에 평화시장에 취직하게 되는데, 자기도 그렇게 못 살고 했는데 당시 그 '시다'라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보고 이 사람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다의 월급이 하루에 14시간에서 16시간 일합니다. 휴일은 없습니다. 한 달에 이틀. 그리고 그 공장 봉제공장 작업장은 정말 열악했어요. 실 풀이 풀풀풀 날리는 그 속에서 환기통도 없이 한 층을 1.5m로 나누어서 아주 허리도 제대로 못 펴는 그 과정에서 일을 하는데 하루 일당이 50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른바 요즘은 없어졌지만, 다방 커피라고 있었어요. 그 젊은 여성들이 서비스한다, 그 다방 커피에서 찻값이 50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계란 띄운 쌍화차를 먹으면 200원이었어요. 그런데 16시간 일하고 커피 한 잔 값이라 하는 것은 전태일이 봤을 때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자기도 그 정도에 있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그런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연민이 나중에는 커다란 사상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김상호 사회자]
전태일 열사의 당시 분신할 당시의 상황을 말씀을 주셨는데,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 발전 이후의 성과의 밑받침은 그런 일당 50원 받고 일하던 여공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의 어떻게 보면 피와 땀이 밑바닥이, 밑바탕이 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게 되는데요. 전태일 열사를 흔히 이야기할 때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전과 후로 나뉜다고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만큼 전태일 열사가 노동 운동에 끼친 영향력이 큰데 그 이유는 전태일 열사가 가지고 있던 전태일 정신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사장님 보시기에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어떤 거라고 보십니까?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렬하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까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그 연민으로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리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우리를 기계 취급하지 마라라는 이 유언을 남긴 이게,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때 평화시장 옆에 서울법대가 있었어요. 상대와 법대가 있었는데 그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겁니다. 이게 몰랐다기보다는 한 노동자의 그 외침이 사실 충격을 주었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나라의 노동 운동이라든가 민주화 운동이 적어도 브루스 커밍스 같은 사학자들은 한 몇십 년이 앞당기지 않느냐.

제가 전태일을 오랫동안, 전태일의 자료를 충분히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 전태일 정신의 본질은 이거였어요. 전태일이가 천막촌에 살면서 길가에 버려진 곰팡이 핀 무말랭이를 들고 집에 가서 씻어서 그거를 소금을 쳐서 그렇게 먹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생활을 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래서 제가 전태일 동생 전태삼 선생한테 물어봤어요. "형님이 어떻게 그렇게 살면서도 어떻게 연민을 나타낼 수 있었냐?" 하니까 전태일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거는 제가 하는 전태일 정신의 핵심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만 하면 그 불우했던 과거가 삶의 영역에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불우했던 과거를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우리의 꿈과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부르는 희망의 새로운 미래로 바꾸어야 한다" 이거는 동생한테도 이야기하고 수기에도 남아 있는 글입니다. 국민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어떤 국문학자나 어떤 철학자보다 저 말의 표현이 정갈하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바로 이게 전태일 정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읽어주신 부분을 들으면서 전태일 열사는 참 비범한 분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쉽게 말하자면 본인도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본인과 비슷한 처지, 혹은 본인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공들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그렇죠.

[김상호 사회자]
지금같이 이렇게 돌아보면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방금 이사장님 말씀 주신 것처럼 전태일 열사가 한 말 중에 그 당시 많은 대학생을 가슴 아프게 했던 얘기가, 나한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런 얘기 하셨다는데, 그 얘기를 들은 대학생들이 받았던 충격은 정말 컸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엘리트인데, 우리가 사회에 어떤 약자에 대한 애정과 정서적인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충격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많은 사회적 약자들, 그때와는 다른 경제적인 측면 말고도 많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약자가 있는데, 전태일 열사의 정신도 말씀을 주셨습니다마는 전태일 열사가 만약 지금 우리 사회의 여러 상황을 본다면 어떤 생각 하셨을까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지금 하나로 예를 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몇 년 전에 열차 수리하다가, 라면 먹을 시간도 없이 열차 수리하다가 죽었던 구의역 사고, 그리고 저 캄캄한 밤에 혼자 컨베이어 벨트를 조정하다가 거기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노동자, 이런 걸 생각하면 아마 전태일이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런 데 대해서는 차이, 그리고 지금 뭐 여러 가지 원청, 하청 이러한 많은 문제에 있었던 약자적인 노동자들을 굉장히 먼저 생각했을 겁니다.

[김상호 사회자]
여전히 그때 전태일 열사가 가졌던 정신이 우리 사회에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살아 움직이는 정신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진행형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있다고 말씀 주셨는데 이거는 이 질문은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셨던 당시의 상황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말이 산업화의 과정이고 그 당시에는 국가 근대화라는 말로도 했고 그걸 가장 열심히 움직였던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는 있고 한쪽에서는 산업화의 아버지고 우리를 지금까지 잘 살게 해준 은인이고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는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와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 핍박이 있었다고 평가가 두 가지 모두 존재하는데, 지금 대구에 쟁점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박정희 대통령 전 대통령 동상 건립과 관련한 것입니다. 대구도서관하고 동대구역 광장에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우려고 하고 있는데, 지형상으로 보면 반대편에 위치한 상징인 전태일 열사의 기억 공간, 지금 집을 복원해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를 추진하고 계신 이사장님께서 보시기에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건립하려는 이런 움직임, 시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참 예민한 질문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사회를 반으로, 박정희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했던 것은 참 아쉽고 참 애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 박정희를 지금, 대구시에서 박정희 동상을 건립하고 있잖아요? 여기에서는 박정희라는 어깨에 물신주의, 자본주의를, 그걸 하는 것이 어떤 도덕적 이상이나 어떤 철학적 사유라는 것이, 이런 것이 없이 강력한 이 권력에 대한 향수입니다, 특히 대구에서 하는 거. 그래서 홍준표 시장이 이 동상 건립을 빌미로 대권 도전의 무기로 활용하는 데 대해서는 정말로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 동상 건립이라는 것을 저희가 볼 때 이 수단과 동기가 굉장히 불순합니다.

[김상호 사회자]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평가하려는 의지를 생각해 주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개인의 욕심이···

[김상호 사회자]
그러면 역으로 이사장님께서는 전태일이야말로 대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생각한다, 그리고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해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전태일이 제가 자료를, 원고지로 하면 한 2만 매가량을 제가 읽어봤습니다. 다 자세히 읽었었고 지금 가장 중요한 전태일 사상을 알 수 있는 전태일 평전을 봐도 그걸 다 담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뒤에 조영래 변호사가 돌아가신 뒤에도 여러 자료가 있고 이런 데서 봤을 때, 지금 단순하게 노동 투쟁가로만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바입니다.

그래서 전태일의 존재를 더 자세히 보게 되면 우리 시대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어떤 사회든지 모순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모순을 가장 통찰력 있게 바라봤습니다. 이게 여러 수많은 글에서 그게 다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혜의 원천이었고, 그리고 어린 여성 노동자를 먼저 생각했던 것은 도덕적 사유의 그 모범입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불살라서 노동자에게 희망을, 노동자에게서 희망을 준 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사랑의 실천가였습니다. 여기서 바로 이것이 제가 방금 세 가지 말씀이 전태일 정신이라고 봅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이사장님 말씀을 들으면 단순히 전태일 열사를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 하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은 전태일 열사의 전태일 정신을 어떻게 보면 아주 축소해 버리는 거다, 전태일 열사의, 전태일 열사를 기려야 하는 이유는 노동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상징이 됐다가 아니라···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그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중요한 요소지만 거기에 더 넘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 그리고 본인에 대한, 본인을 희생해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희생한 숭고한 희생정신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이는데, 그 정신을, 옛집을 복원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좀 느끼고 이렇게 해서 전태일 열사의 뜻이 좀 잘 전해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까 말씀하셨지만, 셋집에 사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일반분들이 방문을 하셔서 그 작은 방의 크기, 두 평짜리 방의 크기를 직접 보실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기억 공간의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는데, 지금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진행이 됐는지도 소개를 좀 해 주시죠.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먼저 우리가 복원하는 것은 두 평의, 아버지의 생계인 미싱 두 대를 놓고 여섯 가족이 살았습니다. 이건 지금은 이 탁자 정도밖에 안 되는 여기서 살았지만, 전태일이가 남긴 글 중에서 여기에 대한 추억이 거의 기본이 됐습니다.

그 기본이 뭐냐 하면 첫째, 배우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사정상 배우질 못했어요. 거리에서 비렁뱅이 생활.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 옆에 한 300m 떨어진 명덕초등학교에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었습니다. 야간인데 선생님은 바로 대학생이었고 여기에서 첫째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거리에서 비렁뱅이 생활을 하니까 친구들이 없잖아요? 있을 수도 없고. 그리고 여기에서 그 열다섯 살 전후 바로 그때 친구를 사귀게 됐습니다. 그 친구들이 삼총사라고 죽기 전까지 그 친구들을 잊지 못하고 그 우정을 간직했습니다. 세 번째는 참, 그 청춘의 나이, 피 끓는 청춘의 나이 때 김예분에게 짝사랑을 느꼈어요. 그래서 인간적인 어떤 모든 자기가 할 수 있던 거 물질적인 그런 것은 하지만 정신적으로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집에서 전태일이가 형성했던 것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래서 이 집은 어떻게 보면 전태일 정신이 육성되는 자양분이 된 그런 장소고 공간이고 그런 의미에서 대구는 그 어떤 곳보다도 전태일과는 뗄 수가 없는 공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설계하실 때도 조금 그런 것들이 이렇게 잘 드러나거나 경험할 수 있도록 진행하실 것 같은데, 하나 지금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어떤 공간에 배치 계획이라든지 이런 거는 진행되는 게 있는지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저는 뭐 세계 여행을 하면서 중요 유적지를 봤는데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원형을 보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갖다가 부수고 새 건물 세우고 뭐 이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숨 쉬던 그거를 재현하는 겁니다. 그 재현 상태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아, 저렇게 살면서도 위대한 희망을 가졌었구나' 하는 그런 교훈을 줄 수 있는 장소로 만들려고 합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5년째에 접어들었는데요. 건립 과정에 분명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고 이게 누가 돈을, 이렇게 큰돈을 출연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공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시간도 상당 시간이 걸렸고, 그다음에 중간에 일부 기사를 보게 되면 운영 주체 관련해서 논의가 여러 가지 있었고 이런 얘기들도 있는 것 같은데, 건립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소개를 좀 해 주십시오.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제일 처음 어려움은 2년 안 되는 기간에 집을 매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많은 돈이 되고 쉽게 집을 매입하는 그 과정에서 또 집값이 또 상승했어요. 상승했는데 그 상승분을 다 하고 난 뒤에도 그걸 했고,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이런 복원 사업을 하려 하는데, 복원 사업이 사실은 누구 하나의 의견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많은 전문가 내지는 어떤 역사적, 실증적 이런 걸 해서 해야 하는데 코로나가 닥쳤잖아요? 그래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고 2023년 초에서야 비로소 이걸 갖다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 모일 수가 있었고, 2023년에 모여서는 아까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자는 것도 있고 복원을 중심으로 하자고 했는데 결국은 복원을 중심으로 하자, 새로운 공간은 또 어느 곳에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는데 복원은 딱 한 곳밖에 할 수 없어서 그래서 복원을 지금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결국 여기에 드는 비용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금적인 면에서 지금 상황은 어떠신지요?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지금 대구라고 하면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고, 이런 보수 지역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도덕성에 대한 이 전태일은 질문을 한 사람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발달해도 되느냐고 도덕적 질문에 대해서 아마 대구 사람들은 시민적 의식이 괴리가 좀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어려움이 일단은 제일 많고 그게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라도 더 선한 자본주의로 갈 수 있다 하는 이 전태일을 통해서 그렇게 바뀔 수 있다 하는 거기에 대해서 대구시민이 좀 기대해 주시고.

두 번째는 아까도 말씀드린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노동 투쟁가로 바라볼 때는 전태일이라는 그 사람이 지녔던 사상을 너무 협소하게 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내는 것은 우리가 가장 인류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의 하나인 그리스도교 못지않은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기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는 이 전태일의친구들은 전태일 기념관을 세우려고 합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여전히 어려우시죠?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많이 어렵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많은 관심이 있는 분들 오늘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단순히 노동 운동가라기보다는 우리가 훨씬 더 많이 전태일 정신에 대해서 배우고 마음에 담고 깨닫는 계기가 되는 많은 내용들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요, 좀 더 많이 널리 알리고 전태일 의사를 그런 면에서 더 기념하고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모시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 우리가 몰랐던 얘기부터 지금 진행하는 상황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이사장님 고맙습니다.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
MBC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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