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민주당의 피가 흘러”…국회의장, 중립성·당파성 사이 줄타기

임재우 기자 2024. 4. 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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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BAR_임재우의 여의도 스밍
추미애 당선자. 연합뉴스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국회의장 후보자가 노골적으로 민주당 편을 들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합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의원들이 뽑았다는 이유만으로 편향적인 사고와 발언을 하는 것은 의장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발끈합니다.

언뜻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자들 사이의 ‘선명성 경쟁’이 치열한 최근의 상황처럼 보입니다.

조정식 의원. 연합뉴스

하지만 이 발언은 2022년 5월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김진표 의장이 한 말입니다. 김 의장은 임기 마무리를 한 달 앞둔 최근에는 친정인 민주당에서 ‘여야 합의를 지나치게 중요시한다’는 불만을 사고 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은 오랜 논란거리입니다.

국회법에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규정은 없습니다. 다만 국회법 제20조의2는 ‘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의장에 선출된 의원은 소속 정당에 탈당계를 내고 무소속으로 의장 임기를 보냅니다. 2002년 국회법이 개정되면서 이만섭 당시 국회의장이 민주당을 탈당한 뒤, 20년 넘게 유지되어온 국회 풍경입니다.

정성호 의원. 연합뉴스

하지만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레이스에 뛰어든 민주당의 중진 의원들은 앞다퉈 ‘의장의 중립성’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을 내놓고 있습니다. ‘혁신 의장’을 앞세워 가장 먼저 의장 선거에 뛰어든 추미애 당선자(6선)가 “(국회의장이) 중립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어 의장 출마를 공식화한 조정식 의원(6선)은 “의장이 되면 긴급 현안에는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고 했고, 이재명 대표의 측근인 정성호 의원(5선) 역시 “(의장이) 기계적으로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사실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닙니다.

직전 의장 선거만 돌아봐도, 후보들 사이에서는 요새 못지않은 ‘선명성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5선의 김진표·조정식·이상민 의원과 4선의 우상호 의원 등이 의장직 도전에 나섰는데 당시에도 ‘민주당 편에서 윤석열 정부를 견제하겠다’는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김진표 의원은 당시 “국회를 무시하고 사법 권력을 무자비하고 휘두르며 국정 독주를 해 나가는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는 일이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사명이고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조정식 의원도 “국회의장이 되더라도 민주당의 일원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 정신을 근본에 두고 국회의장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장 후보들의 ‘당심 구애’는 유권자가 소속당 의원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국회의장은 관례상 원내 1당에서 한명의 후보를 본회의 표결에 올리고, 이 후보가 재적 의원 과반의 동의를 얻으면 최종 선출됩니다. 의장 후보들로서는 당내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내놓는 게 급선무인 셈입니다.

그런데 막상 의장이 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곤 합니다. 김진표 의장은 예산안 처리나 쟁점 법안 처리 과정에서 여야 합의를 수차례 요구해 당내 원망을 샀습니다. 전임인 박병석 의장 역시 민주당이 검찰 수사권 분리법안을 처리할 당시 강성지지층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의장실에 근무했던 한 민주당 관계자는 “국회의 수장인 의장의 성과는 결국 여야 대립 속에 얼마나 매끄럽게 중재를 끌어냈느냐에 달려있다”며 “파국을 막으려 조정자 역할을 하려다 보면 양쪽에서 욕먹는 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행정부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과 동일 선상에서 놓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의장의 중립성은 의회의 대표자로서 당론 등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것이지, 본인 역시 국회의원의 한 명인 의장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탕으로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국회법에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못 박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중립성을 완전히 방기한 채 본래 소속된 정당의 편만을 든다면, 소수당의 반발로 정상적인 국회 운영이 불가능해질 겁니다. 의장이 당적을 갖지 못하도록 한 국회법 제20조2의 취지에도 반합니다. 국회법 해설은 해당 조항 입법 취지에 대해 “의장이 입법부의 수장임을 명백히 함과 동시에,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국정운영에 초당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의장은 정치적 소신을 지닌 국회의원이자 소속 정당을 넘어서야 하는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중립성과 당파성’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중립성을 깨겠다’고 공언하는 이들 중에서 나올 다음 의장은 임기 시작 뒤에는 이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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