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돈에 발목 잡힌 '기괴한 아파트 이름'의 단상

김창성 기자 2024. 4. 30.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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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아파트 단지 이름이 곳곳에서 조롱을 받고 있다. 사진은 서울시내 한 아파트 밀집 지역. /사진=뉴스1
최근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 단지명을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서울 동작구 흑석11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흑석11구역) 조합이 아파트 이름에 들어가는 지역명을 집값이 더 비싼 옆 동네 '반포'로 넣었다는 얘기가 들려서다.

최근 정비업계에서는 흑석11구역 조합이 조합원 투표를 거쳐 단지명을 '서반포 써밋 더힐'로 결정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써밋은 시공사 대우건설의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다. 문제는 단지명에 붙은 '서반포'와 '더힐'이다. 곳곳에서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반포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명인 데다 흑석11구역이 위치한 동작구와도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 위치가 반포동의 서쪽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집값이 더 비싼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에 속한 반포를 단지명에 넣은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진다.

'더힐'이라는 이름도 조롱거리가 됐다. 흑석동 일대가 가파른 언덕이어서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만 서울 최고가 빌라 가운데 하나인 용산구 한남동의 '한남더힐'을 따라했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다.

다소 생뚱맞은 아파트 단지명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아파트 이름을 어떻게 짓든 조합의 재산권 행사에 대중이 관여할 수는 없다"는 일각의 의견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서반포 써밋 더힐'이라는 단지명이 결정됐다는 소식은 아직 결정된 바 없는 해프닝으로 일단락 됐지만 그동안 이 같은 아파트 단지명 논란은 재개발·재건축(정비사업)이 호황을 누리던 2010년대 들어 심화돼 계속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국내에 아파트가 확산되기 시작한 1970년~1980년대에는 '은마아파트', '압구정현대아파트' 등과 같은 이름이 대중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들어 수도권 1기신도시에는 '꿈마을', '하얀마을', '포도마을', '무지개마을' 등의 이름이 유행했다.

지역명이 없어 직관성이 떨어져도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 같은 형태의 아파트 단지명은 최근에도 세종특별자치시의 신규 단지에 적용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러 대형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래미안', '힐스테이트', 'e편한세상', '푸르지오', '자이' 등의 아파트브랜드가 경쟁적으로 도입됐고 고급화가 유행하며 '디에이치', '아크로', '써밋' 등도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파트브랜드와 대치·삼성·반포 등 지역명이 결합돼 단지 이름만 대면 경제 계급을 가늠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아파트가 사실상 계급을 나타내다 보니 '기괴한 아파트 이름' 마저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영어 단어를 혼합하는 것도 모자라 그리스·스페인·프랑스·라틴어를 동원하고 어떻게든 있어 보이게 하는 데만 혈안이 됐다.

집값이 더 비싼 부촌을 따라 사는 동네 이름마저 버리는 행위가 빈번해졌다. 이는 아파트값 상승을 노린 행태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역세권·교육·공원·숲·강·바다 등 입지에 따라 메트로·에듀·파크·포레스트·리버·오션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보편화됐다. 이 같은 아파트 이름이 유행하며 스무 글자가 넘는 단지명이 등장해 화제를 모을 정도다.

단순 주거 공간을 넘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아파트 시대의 단상이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파트 이름을 짓는 것이 재산권의 행사라는 면에서 이상할 게 없지만 집값 상승을 염원한 의도라서 씁쓸하다.

이제는 자중할 필요가 있다. 부르기 쉽고 끄덕일 만한 아파트 이름은 대중의 조롱거리가 아닌 아파트의 품격을 높일 것이다.

재산 증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지만 기괴한 이름으로 단지를 계급화하는 문화와 이를 따라 미래 세대인 자녀들에게까지 차별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실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성 세대의 욕심으로 괴상한 유산을 남기지 않았으면 한다. 자녀들의 이름에 이해할 수 없는 합성어를 넣어 '홍 니노막시무스카이저소제 길동'이라고 지으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싶은 허울을 버리고 부실 없는 아파트를 짓겠다는 조합의 의지가 진정한 자부심이다. 속이 꽉 찬 아파트를 지으면 품격과 가치 상승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부르기 쉬운 아파트, 정감 가는 아파트 이름을 지향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창성 기자 solrali@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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