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님, 전 세계 농산물 물정을 알려드립니다

이오성 기자 2024. 4. 30.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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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총재가 농산물 수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농업 역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입을 확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월12일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은행 총재가 놀라운 발언을 내놓았다. 4월12일 통화정책 방향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이창용 총재는 “기후변화 이런 게 심할 때 생산자 보호를 위해 지금 같은 정책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농산물) 수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기후변화 등으로 생기는 구조적인 변화에 대해 국민의 합의점이 어딘지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됐다”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국내 농산물 가격 상승 탓이므로 외국 농산물을 대폭 수입하는 걸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여기에는 언제까지 정부가 국내 농가를 보호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담겨 있다. 일부 언론은 이 총재의 발언을 두고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고 썼다.

한국은 이미 자유무역협정에 적극적인 ‘개방형 통상국가’다. 식량의 절반 이상을 해외 수입에 의존한다(2023년 기준 식량자급률 49.3%). 이 총재의 발언은 결국 식량자급률 하락도 감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급률을 55.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호언한 윤석열 정부의 방침과도 어긋나는 말이다.

농민 처지에서는 경악할 만하지만, 물가 관리를 책무로 하는 한국은행 총재가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한 말이다. 발언 이후 온라인 공간 등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의견도 올라오고 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국내 농업의 붕괴’를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지만, 이창용 총재가 결정적으로 간과한 문제가 있다. 다른 나라의 농업 역시 기후위기로 인한 ‘구조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가장 ‘뜨거운 과일’ 사과를 보자. 사과는 국내 농가 보호를 위해 수입을 금지한 과일 중 하나다. 사과 값이 뛰자 수입하자는 여론도 덩달아 높아졌다. 현재 한국에 사과를 수출하겠다는 나라 중 수입 위험분석 절차가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인 나라는 일본이다.

■ 일본에서도 나온 ‘사과 소멸’ 시나리오

일본의 최대 사과 생산지는 아오모리현이다. 2022년 8월 일본 북부지방을 강타한 폭우로 아오모리현이 큰 피해를 입었다. 1787㏊가 침수됐다. 아오모리현의 농작물 피해액이 약 800억원인데, 그중 사과의 피해액이 약 200억원이었다.

2021년에는 나가노현에서 냉해 피해가 발생했다. 4월 중순 서리가 내리면서 사과 꽃이 죽는 바람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 지난해 한국의 사과나무가 겪은 냉해 피해와 똑같았다. 나가노현 내 피해액은 약 200억원에 달했다. 기후변화로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의 사과 가격 역시 등락이 심했다. 사과 값 급등으로 과수원에 ‘사과 도둑’이 출몰한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기후변화로 사과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계속되는 기온 상승으로 2060년이 되면 아오모리현 등 동북부 지방의 평야 지대에서 사과 재배가 어려워지리라는 것이다. 한국 역시 2070년대에 사과가 사라진다는 전망이 나온 바 있다(〈시사IN〉 제852호 ‘기후위기의 무서운 풍경, 2070년 ‘사과 소멸’ 시나리오‘ 기사 참조). 〈아사히신문〉은 농업 전문가의 말을 빌려 “지금처럼 온난화가 진행되면 미래에는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만 남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사과 수입 검토 대상국 중 하나인 미국도 사과 작황이 불안하다. 2022년 미국의 최대 사과 생산지인 워싱턴주의 수확량이 급감했다. 4월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등 이상기후가 과수원을 덮쳤기 때문이다. 2022년 워싱턴주의 사과 수확량은 1억 상자 남짓이었는데, 이는 1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였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사과 생산지인 뉴욕주 허드슨밸리에서는 2012~2017년에 농장 2000개 이상이 문을 닫았다. 지역 전체 과수원의 6%에 해당한다. 겨울철 이상고온과 봄철의 폭풍 탓이었다. 지난해에는 봄철 서리를 맞아 뉴욕주 사과 생산량이 약 20% 줄었다. 수확철을 앞두고는 우박 피해도 속출했다. 우박을 맞아 상품성이 떨어진 사과는 결국 푸드뱅크로 보내졌다.

세계 최대 사과 생산국은 중국이다. 전 세계 사과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중국의 기후변화는 전 세계 사과 값에 큰 영향을 미친다. 흉작으로 중국의 사과 수출량이 떨어져서? 아니다. 중국이 전 세계 사과를 대량 수입해버리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생산국이라는 말은, 그만큼 중국인이 사과를 좋아하고 많이 먹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사과 수입국이 됐는데 중국의 사과 농사에 흉년이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수입산 금사과‘란 말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4월17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과일 코너에 오렌지 등 수입 과일이 진열되어 있다. 정부는 농산물 값 안정을 위해 수입 농산물의 관세를 대폭 낮췄다. ⓒ시사IN 조남진

■ 100% 오렌지주스 구하기 힘들어진 이유

우리가 즐겨 먹는 수입 과일의 사정은 어떨까. 우선 바나나를 보자. 지난 3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바나나 포럼(WBF)'의 주제는 기후변화였다. 가뭄과 홍수,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로 인해 바나나 생산자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자연재해가 전 세계 바나나 무역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생산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라고 밝혔다.

기후변화는 바나나 나무가 말라죽는 파나마병의 확산을 부채질하고 있다. 기온 상승 등 영향으로 파나마병을 유발하는 곰팡이가 퍼지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페루 파나마에서 처음 발견된 이 병은 아시아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까지 번지면서 전 세계 바나나 농장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과일인 바나나 가격은 지난 20년 동안 세 배 올랐다.

오렌지도 마찬가지다. 요즘 마트에서 100% 오렌지주스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오렌지 가격이 치솟으면서 식품회사가 원액 함량 비율을 낮춘 제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델몬트의 경우 지난해 오렌지 원액 함량을 100%에서 80%로 낮춘 제품을 출시했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허리케인과 냉해 등으로 오렌지 생산량이 크게 줄었고, 브라질에서는 감귤 녹화병이 번져 오렌지 농사를 망쳤다. 미국의 오렌지 주산지 플로리다에는 2017년에도 대형 허리케인이 덮쳐 큰 피해를 입었다. 오렌지 나무를 다시 심었지만 허리케인의 잇따른 습격으로 농부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현지에서는 오렌지주스 생산량이 100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정부가 과일 값 대책으로 과일 수입관세를 낮추면서 국내에서 부쩍 흔해진 망고는 어떨까. 전 세계 망고 생산량 각각 1위, 5위를 차지하는 인도와 파키스탄은 2022년 사상 최악의 망고 흉작을 겪었다. 여름 전에 닥친 때 이른 폭염 때문이었다. 망고 수확량이 평년 대비 70% 줄고, 망고 가격은 네 배가 치솟았다. ‘망고의 나라’ 인도에서조차 망고가 귀한 과일이 됐다.

수입 과일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2021년 소비자시민모임이 전 세계 10개국 물가를 조사한 결과 바나나, 파인애플, 자몽, 망고의 경우 한국이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국 시장의 크기’가 결정적이다. 서구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보다 수입 물량이 훨씬 적다 보니 단가를 낮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입 과일 역시 중간 유통과정을 거치는 만큼 여기서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한 원인이다.

■ 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수출 대국 인도

인도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인도는 농산물 수출 대국이다. 쌀 수출량은 세계 1위이고, 밀·망고·양파의 수출량도 손에 꼽는다. 지난해 국내에서는 인도의 영향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국내에 수입된 인디카 쌀(안남미) 가격이 국내산 쌀보다 높아진 것이다. 가뭄과 홍수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자 지난해 7월 인도 정부가 쌀 수출을 전격 금지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찬밥 신세이지만, 인디카 쌀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 이런 조치는 국제 곡물 가격을 크게 올렸다. 여기에 환율까지 치솟으면서 국내에 수입된 인디카 쌀 가격이 국내산 쌀을 뛰어넘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인도는 총선을 앞두고 3월23일 양파 수출 금지 조치를 연장했다. 뭄바이 시장에 양파가 쌓여 있다. ⓒEPA

쌀 다음은 양파다. 3월23일 인도 정부는 양파 수출 금지 조치를 무기한 연장했다. 총선(4월19일~6월1일)을 앞두고 양파 값을 잡기 위해서다. 양파 값이 상승하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는 지난해 12월3일, 2024년 3월31일까지 수출 금지 조처를 내렸는데, 선거를 앞두고 이를 무기한 연장한 것이다. 이 여파로 주변국의 양파 가격이 치솟았다.

인도 요리에 빠지지 않는 양파는 정치적으로도 상징적인 식재료다. 과거 인도에서는 양파 값 상승이 이슈가 되면서 선거에서 승패가 여러 차례 갈렸다. 모디 정부로서는 수출 금지라는 조치를 취해서라도 양파 값을 잡을 필요가 있다. 한국은 대파가, 인도는 양파가 총선판을 뒤흔든 셈이다.

기후변화로 흉작이 이어지면서 인도의 농산물 수출 금지 조치는 2022년부터 본격화했다. 그해 5월에는 밀, 6월에는 설탕, 8월에는 일부 밀가루 수출을 금지했다.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의 이런 행보는 국제적 식량 대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인도뿐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식량 수출 제한 조치를 늘리고 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식량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한 국가는 16개국으로 늘어났다. 인도네시아는 팜유, 아르헨티나는 쇠고기, 튀르키예는 곡물류 수출을 제한했다.

다시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으로 돌아와보자. 이런 상황에서 수입을 확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밥상을 불안정한 국제 농산물시장에 맡기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곡물류와 달리 사과 같은 신선과채류는 멀리서 오는 수입산보다는 국내산이 경쟁력이 있으므로 농업 기반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 대파 값 논란 이후 농촌에 벌어지는 일

과연 그럴까. 최근 우리 사회를 달궜던 대파로 눈을 돌려보자. 대파 산지인 해남군 농민회장 이무진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파 값 875원 논란 이후 지금 밭에서 대파가 썩어가고 있어요. 왜냐? 정부가 대파 값을 잡겠다고 수입량을 엄청나게 늘리니까 유통인들이 안 사가려는 거예요. 이러면 농민들이 대파 농사를 포기하게 돼요. 그 결과 점점 수입량이 늘겠죠. 결국 대파 농사 기반이 사라지게 될 겁니다.”

3월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수입농산물 철폐 전국농민대표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국내 생산량이 줄었다고 수입을 늘리면 이를 계기로 유통 채널이 구축되고 그 결과 수입품의 경쟁력이 더욱 높아진다. 결국 농민은 해당 작물을 포기한다. 대파는 물론 사과의 운명도 길게 보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소비자는 값싸게 농산물을 먹을 수 있지 않겠냐고?

스웨덴 스톡홀름 환경연구소는 2022년 ‘무역·식량 안보에 대한 기후위기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농산물 대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일부 국가가 농산물을 비축하거나 이를 무역 제재로 활용한다면 농산물 위기는 더 악화할 것이다.”

식량위기가 일부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여러 국가와 거래를 트면 안정적인 수입 물량 확보가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농작물 작황이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현실에서 수입선 다변화가 말처럼 쉬운 일일지 의문이다. 백혜숙 지속가능국민밥상포럼 대표는 “무턱대고 수입에 의존하다가 먹을거리에서 요소수 대란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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