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이튿날 '탕'… 6000만명 죽음으로 내몬 악마의 비겁한 최후 [뉴스속오늘]

이소은 기자 2024. 4. 30.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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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탕'

1945년 4월 30일, 독일 베를린 도심의 지하 벙커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서재에는 총상을 입은 남자와 청산가리를 마신 여자가 나란히 숨져있었다. 6000만명을 죽음으로 내몬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이었다.

이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지 40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가 꿈꾸던 공무원 아들, 독일 총통 자리에 오르다
1889년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에서 말단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9년 나치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며 정치계에 입문했다.

히틀러는 1921년 압도적 지지로 나치당수에 선출됐고 12년 후인 1933년 독일 수상에 올랐다. 이듬해인 1934년에는 총통에 올라 군 통수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를 향한 대중의 지지는 뜨거웠다.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다. 그는 세계정복 야욕을 품고 폴란드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을 점령해 나가며 유대인 600만여명을 학살하는 만행 또한 저질렀다.

히틀러가 주춤해진 것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참전하면서부터였다. 소련도 탱크부대를 앞세워 독일을 타깃 삼았다. 히틀러와 관계가 깊었던 이탈리아의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 또한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결국 독일은 1943년 옛 소련 스탈린그라드 패전 이후 내리막을 걷게 됐다.

지하 벙커에서 올린 결혼식, 죽음 앞둔 의식
아돌프 히틀러(가운데). /사진=독일 연방 공문서관
소련군이 베를린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점, 아돌프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있었다. 1945년 4월 20일 생일을 맞아 대중 앞에 마지막 모습을 보였던 히틀러는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베를린 도심의 브란덴부르크 문 아래 벙커에 숨어있었다. 이 벙커는 18개의 방과 자가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나치의 모든 고위 장교들이 패전을 직감했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전쟁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가 성난 군중에 의해 처형당한 사실을 듣고 난 후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최후의 순간이 머지않았다고 느낀 것.

그는 비서이자 오랜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4월 29일 새벽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몇몇 측근만 참석해 조촐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결혼식이라기보단 죽음을 앞둔 의식에 가까웠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30일 이 부부는 동반 자살했다. 총성을 듣고 놀라 뛰어간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서재 문을 열었을 때 아몬드가 탄 것 같은 냄새가 났다"고 회상했다. 서재 안에서 히틀러, 브라운 부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을 쏜 후였고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마신 후였다.

사망 후에도 음모론 끊이지 않아 "2018년에야 일단락"
히틀러와 지도자의 아이 로사 베르닐레 니에나우로가 찍힌 사진./출처=CNN 캡처
히틀러의 부관 오토 권세는 운전기사와 함께 시신을 마당으로 옮긴 후 화장을 진행했다. 히틀러의 유해는 소련군에게 넘어갔지만, 소련군은 나치 추종자들이 히틀러를 기리는 추모비를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랜 기간 보관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

워낙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탓에 히틀러의 사망 후에도 '생존설'이 수십 년간 떠돌았다. "서방과의 단독강화를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에 건너가 조용히 살다 1971년 사망했다" "성형수술을 받은 후 남미로 가 농장주로 지냈다" "잠수함을 타고 무사히 탈출해 오랜 기간 생존했다" 등 히틀러의 죽음이 자작극이라는 내용들이었다.

각종 음모론은 2018년 프랑스 연구팀이 "러시아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과 치아를 검사해 부검 기록과 비교한 결과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고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히틀러가 사망한 지 73년 만이었다.

이소은 기자 luckyss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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