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99> 동래 남문비

김정훈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 학예연구사 2024. 4.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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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동래 남문비는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선열을 추모하기 위해 1670년(현종 11) 동래읍성 남문 밖에 건립했으며,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다 부산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래 남문비에는 단순히 선열에 대한 추모뿐만 아니라 숨김없는 과거 기록으로 중요한 교훈과 통찰이 후손에게 영원히 전해지길 바라는 선조들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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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송상현의 의연한 죽음 등 기록한 비석

인류는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인류 최초의 기록은 선사시대부터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는 벽화와 암각화이다.

돌에 새긴 기록은 점차 형태가 정제됐으며, 현재까지 비석의 비문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비석에 정성스럽게 새겨진 비문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고 역사 자료로 귀하게 사용된다. 그중 오늘 소개할 것은 부산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전시된 부산광역시기념물 ‘동래 남문비(사진)’다.

부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최초 상륙지이자 왜군이 가장 오랫동안 주둔한 지역이다. 그만큼 왜란으로 인한 피해도 컸다. 일본에 항전한 인물도 많다. 동래 남문비는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선열을 추모하기 위해 1670년(현종 11) 동래읍성 남문 밖에 건립했으며,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다 부산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었다.

부산 지역의 순절 사적(史蹟)을 빼곡하게 새겨 넣은 비문은 서인 세력의 좌장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비석은 높이 2.25m, 너비 1.21m로 웅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훼손이 심해 비신(碑身)의 박락이 심하고 비문 일부만 남아있다. 여의주를 입에 문 쌍룡(雙龍)을 새긴 머릿돌도 분리돼 옆에 따로 놓여있다. 다행히 훼손된 비문은 이전에 탁본해 놓은 자료가 있어, 비석의 내용과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후 부산진첨사 정발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일, 경상좌병사 이각의 비겁한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과 왜병들에 맞선 처절한 전투, 동래부 전체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고 비를 건립하기까지의 경위를 밝히고 있다.

비문에는 자랑스럽고 본받을 만한 내용뿐만 아니라 왜란의 수난을 겪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숨기고 싶을 수도 있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관련된 일화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동래 남문비에는 단순히 선열에 대한 추모뿐만 아니라 숨김없는 과거 기록으로 중요한 교훈과 통찰이 후손에게 영원히 전해지길 바라는 선조들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비문은 수정과 삭제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고민의 시간이 길 수밖에 없고, 그에 비례해 정해진 분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깊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비석은 엄청난 역사를 품은 귀한 유물이다. 하지만 비석이 빨래판으로 쓰이다 우연한 계기로 국가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중원 고구려비를 비롯한 몇 가지 일화는 석조 유산을 대하는 우리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1592년 음력 4월, 부산에서 임진왜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432년이 지난 만큼 임진왜란 경험을 통해 느낀 바를 후세에 전달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염원은 동래 남문비의 훼손된 비문처럼 옅어지고 있는 듯하다. 동래 남문비 내용이 담은 의미를 꾸준히 헤아릴 때 흐려졌던 비문은 다시 온전히 새겨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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