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남북 단일팀으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33년 전 사진 보면 여전히 뭉클합니다

채민기 기자 2024. 4.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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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49] ‘탁구 레전드’ 현정화
현정화 감독이 인천 청라동 한국마사회 탁구단 연습장에서 옛 앨범과 스크랩북을 펼쳐 보이고 있다. 분단 이후 첫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했던 1991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 대회 당시의 사진들과 경기 결과를 보도한 기사들이 갈무리돼 있다. /고운호 기자

1991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결승(단식 4경기, 복식 1경기)인 중국전을 생각할 때마다 현정화(55)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은 복식 파트너였던 북한의 리분희가 서브 폴트(반칙)를 받던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공을 띄우고 비정상적인 동작을 했다는 건데, 사실 제대로 잘했거든요. 2세트 15대15 상황이었어요.”

1세트를 먼저 이긴 현정화·리분희는 석연치 않았던 이 판정 이후 2·3세트를 내리 중국에 내주고 역전패했다. 앞서 단식 두 경기를 이긴 남북 단일팀에서 중국 쪽으로 흐름이 넘어갔다. 현정화가 세 번째 단식에서 ‘마녀’ 덩야핑에게 졌을 땐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단식에서 북한의 유순복이 신들린 경기로 가오준을 꺾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한 ‘코리아’ 단일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무게 2.7g. 구기 종목을 통틀어 가장 가벼운 탁구공이 남북을 하나 되게 했다. 인천 청라동 마사회 탁구단 연습장에서 최근 만난 현정화는 “그때 선수단 지원과 응원을 준비하면서 민단과 조총련이 처음으로 같이 회의를 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관중석에 교포들이 가득해서 우리 홈경기 같았죠. ‘코리아 이즈 원(한국은 하나다)’ 현수막도 보이고, 다들 우셔서 뭉클했어요.” 여간해서는 울지 않는다는 현정화도 그때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지바 선수권대회 시상대에 선 남북 단일팀 코치진과 선수들(흰옷 왼쪽부터 홍차옥 유순복 현정화 리분희).

◇분단 이후 첫 남북 단일팀

남북은 1991년 2월 판문점 체육회담에서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논의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이뤄낸 합의였다. 한반도기를 걸고 아리랑을 연주하기로 했다. 국호 표기는 ‘KOREA’였다.

4월 대회 개막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합동 훈련을 (남한·북한이 아닌) 제3국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 달쯤 손발을 맞췄다”고 한다. 현정화의 앨범과 스크랩북 속에 당시의 사진들이 남아 있다. 서로 땀을 닦아주던 합동 연습, 단복 차림으로 참여했던 환영 행사, 함께 시상대에 오른 남북한 선수들….

남북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구성된 단일팀「코리아」의 현정화(우)-이분희콤비가 1991년 4월 24일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첫 경기에서 프랑스를 2대0으로 완파, 세계정상을 향한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조선일보 DB
1991년 5월 7일 남북 단일팀으로 지바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한 리분희와 현정화가 헤어지기전에 이분희선수가 현정화 선수에게 우승컵을 전달해주고 있다. /조선일보 DB

리분희와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 대회에서 마주쳤다. 1991년에 한 달간 함께 지내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쪽이 더 호기심이 많아서 우리에게 질문을 많이 했어요. 언니(리분희)가 남자 친구(북한 남자팀 대표였던 김성희) 얘기도 해서 저도 말을 했죠. 듣기만 할 수가 있나요.” 그때 얘기한 남자 친구가 남편 김석만씨로, 역시 주니어 대표를 지낸 탁구 선수 출신이다.

리분희와 마지막 만남은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였다. 현정화가 2005·2018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현정화는 “한 번 언니면 영원한 언니”라면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내 손으로 밥이라도 지어 대접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밤새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현정화가 우승한 대회의 이름이 새겨진 국제탁구연맹(ITTF) 명예의 전당 헌액패.

◇중국이 놓친 유일한 올림픽 여자 탁구 金

현정화·리분희의 이름은 남북 단합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영혼의 복식 파트너’는 올림픽 금메달을 함께 따낸 양영자였다. 올림픽 여자 탁구에서 중국이 가져가지 못한 유일한 금메달이다. 현정화가 국가대표로 발탁된 1985년부터 둘은 복식 훈련에 들어갔다. 그때 이미 여자 복식이 1988년 서울올림픽의 ‘전략 종목’이었음을 보여준다. “언니와 (올림픽 탁구 경기장이었던) 서울대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큰 함성을 틀어놓고 모의 시합도 정말 많이 했죠. (올림픽) 끝나고 언니한테 ‘우리 금메달 따서 정말 다행’이라고 했어요.”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의 영상을 보면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정작 두 선수는 울지도 환호하지도 않고 차분한 표정이다.

세계선수권에서는 1987년 여자복식, 1989년 혼합복식, 1991년 단체전, 1993년 단식 금메달로 전 종목을 석권했다.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던 단식 우승을 이루자 현정화는 이듬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로서 이룬 업적이 2011년에 받은 ITTF 명예의 전당 헌액패에 새겨져 있다. 그가 우승한 다섯 대회의 이름과 함께 “탁구 선수로서 세계의 인정을 받은 뛰어난 성취에 대해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고 적혀 있다. 명예의 전당은 올림픽·세계선수권에서 5회 이상 우승한 선수 출신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한국인은 현재까지 현정화가 유일하다.

인천 서구 한국마사회 타구단 훈련장에서 탁구 레전드 현정화 감독이 본인의 추억이 담긴 물건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고운호 기자

◇”한국 탁구, 바닥부터 다시 다져야”

부산 출신인 현정화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드라이브형 선수였지만 중학교 3학년 무렵 펜홀더 그립의 ‘전진 속공형’으로 전향했다. 탁구대에 가까이 붙어 상대가 넘긴 공을 재빨리 받아치는 스타일이다. 그에게 전향을 권한 이가 197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였다. 현정화는 “그때 제가 파워는 좀 부족해도 공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보셨던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초 부산에서 열린 탁구 세계선수권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유승민 조직위원장에게 위촉장을 받았다. 현정화는 “한국 탁구 100주년을 맞아 고향에서 열리는 대회에 기여할 수 있었으니 탁구인으로서 복 받은 일”이라고 했다. 한국에 탁구가 도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한탁구협회는 1924년 경성일일신문이 주최한 ‘핑퐁경기대회’를 출발점으로 본다.

남녀 단체전으로 진행된 대회에서 한국은 남자부 동메달을 획득했다. 현정화는 경기 결과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여자 선수들은 몸이 많이 굳어 보였고, 남자 선수들도 메달은 땄지만 중국과 접전을 벌인 것으로 만족하는 게 아쉬웠어요. 중국을 반드시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체력, 정신력, 기술력을 다시 점검해야 한국 탁구가 한걸음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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