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27] 화염과 등불

이응준 시인·소설가 2024. 4. 2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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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출간했을 때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로맨틱 코미디를 쓰셨는데요, 이런 이야기의 목적은 뭔가요? 사랑은 이루어진다? 그런 건가요?” 아니다. 비극이 아니라 희극의 경우, 사랑 이야기의 본질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성장(growth, development)’에 있다. 결말에서 커플이 연애를 이어나가거나 헤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랑을 통해 둘이 ‘각자’ 그리고 ‘함께’ 자아와 영혼이 성장했다면 그게 ‘해피엔딩’이고 잘 만든 ‘사랑의 희극’이 된다. 하지만 현실 속 남녀 간의 사랑은 대부분 부정적 결말, 지루한 매너리즘과 허무한 일상, 간혹 사건 사고나 심지어 파멸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차라리 비극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다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이도 저도 아닌 괴로움으로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변질(變質)이 고질(痼疾)이 돼버린 사랑도 적잖다. 사랑의 반대말은 뭘까? 사랑이 부패해 미움의 거름이 되는 것은 맞지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상처’다. 그리고 이 상처는 그 종류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삼국유사’ 이혜동진(二惠同塵) 편에 실려 있기도 한 선덕여왕에 얽힌 설화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다양한 버전과 해석들’이 있고 계속해서 새롭게 각색되지만, 중심축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흠모해 상사병을 앓는다. 이 소식을 우연히 들은 선덕여왕은 자비심이 들어, 절을 방문할 적에 지귀를 부른다. 그런데 지귀는 선덕여왕이 불공을 드리는 사이 탑 옆에서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린다. 선덕여왕은 그런 지귀 가슴 위에 금팔찌를 놓아두고는 궁으로 돌아간다. 나중에 잠에서 깬 지귀, 이 사실을 깨닫고는 미쳐버린 나머지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어 타오른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진짜로 심장이 점화(點火)돼 온몸이 화염에 휩싸여 탑을 불사르고 절을 불사르고 거리와 세상을 불살라 버린다.

바로 이 부분, 지귀가 ‘물질적’ 화염으로 변해버리는 장면이, 나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자고 일어나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국면만큼이나 ‘현대적’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화염이 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방화(放火)해 버리는 것은 문학적 텍스트에서나 미학적 가치가 있지 현실에서는 있는 그대로 불행이고 재앙일 뿐이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고 부처는 가르쳤으되, 사랑이야말로 화염이 아니라 어두운 삶에서 서로의 길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는 게 합당하다. 그러지 못했던 내 지난 날들을 후회하며, 누구의 내면이든 어느 곳이든 미움이 득세하고 있다면 그건 정작 미움 때문이 아니라 그릇된 사랑이어서가 아닌가 숙고해본다. 그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건 말이다. 한국인은 저마다 등불이 아니라 화염이고 그래서 한국 사회는 늘 불구덩이인 게 아닐까.

“당신은 사랑입니까, 상처입니까?” 거울 앞에 홀로 서서, 어떤 것에 대한 증오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는 짓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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