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대권 없는 나라’를 고민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마지막 부분을 보면, 권력구조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해 왔고, 특히 4년 중임제의 정·부통령제를 주장해 왔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밝힌다. 그는 “대통령제하에서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 후로도 독재자나 그 아류들이 출현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제는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 봄 직하다”며 “이원집정부제나 내각 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떤 권력구조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단정적 의견을 밝힌 것은 아니다. 다만, 5년 단임 대통령제라는 현행 권력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평생 국가의 미래를 고민해 온 정치지도자가 남긴 말이니 숙고해야 할 주제임은 분명하다.
큰 틀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대통령제는 최소한의 보완장치라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일관성이 상실되는 것은 물론이고, 진영 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최소한 국내적으론 미국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예컨대 인사권이 그렇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자리는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등 몇 자리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대통령과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 인사권을 행사한다. 장관 등에 대해 인사청문회를 거쳐도, 임명은 대통령 마음대로다.
인사권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회계검사원이 국회 소속인 반면, 한국의 감사원은 대통령 소속이다. 한국의 감사원은 신뢰를 상실했고, 정권 입맛에 따라 감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할 기구들은 언론을 ‘입틀막’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권력은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국정운영의 투명성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독재적’ ‘국정농단’ ‘비선’ 같은 단어들이 등장해 왔다.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윤석열 정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여러 불법 의혹들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용산으로의 대통령실 이전은 그 자체가 엄청난 권한남용이었다. 대통령실 이전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취임도 안 한 상태에서 밀어붙인 것은 지금의 대통령제가 가진 위험성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당선되는 순간 ‘왕’처럼 군림하고,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행태가 가능한 것이 지금의 대통령제다. 게다가 대내외적인 위기는 심화되고 있는데, 대통령은 ‘부산 엑스포 유치’에 목을 매다가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때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통령의 심각한 비민주적인 행태가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단지 사람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장 대통령제를 그만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는 현재의 방식을 유지하되,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수평적-수직적으로 분산시켜야 한다.
국무총리가 헌법상 보장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보완은 필요하다. 감사원도 독립기구로 전환하거나 국회로 이관해야 한다.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서 대통령 선출과정의 민주성도 보강해야 한다. 획기적인 지방분권도 필요하다. 국민소환, 국민발안, 실질적인 배심재판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도록 선거제도의 원칙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
‘대권(大權)’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도 임기직 공직자일 뿐이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다. 대통령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어야 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적절한 사람이 적재적소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줄서기’만 잘하면 고위직이 될 수 있고, 독립성이 생명인 곳들이 정권에 따라 흔들린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대권’이란 단어 자체가 없는 나라가 진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닐까?
언론들이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하는 ‘대권경쟁’도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 자리에만 앉으면 된다는 식의 대권경쟁은 국가공동체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국가공동체의 비전과 시대적 과제에 대한 대안을 놓고 ‘비전경쟁’ ‘대안경쟁’을 해야지, 권력다툼만 할 때가 아니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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