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겨운 서커스 불쌍한 원숭이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 시인 2024. 4. 2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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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상희구의 ‘동춘 사까수단’
화려한 서커스 천막의 뒷편
쇠사슬에 묶인 생명의 애잔함

동춘 사까수단

동춘 사까수단은 꼭 잊을 만한 때쯤
늦가을이면 신천新川 갱빈에 등장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사까수단의
단원들이 천막 한 모퉁이에 길길이 널어놓았던
형형색색의 빨래들이었습니다

쌉싸리한 가을바람에 한껏 펄럭이던 빨래는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사까수단의 천막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저 머언 하늘 쪽으로

또한 높다란 천막 위에는 아득히 누마루를 만들어놓고
그 위로 악사樂士들이 늘어앉아
음악을 연주하곤 하는 것이었는데
압권은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트롬벳 소리였습니다

이 트롬벳 소리 또한 사까수단의 천막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저 머언 하늘 쪽으로

사까수단이 떠나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까수단은 사라져버리고
천막 기둥을 뽑아낸 휑한 구덩이만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사까수단을
늘상 따라다니며 목에 쇠오랏줄을 한 채,
남국南國 고향을 생각는지
늘 눈망울이 애잔했던 그때 벌써 늙었던
한 마리 원숭이였습니다

「大邱」, 도서출판 황금알, 2012

구경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동춘 서커스단의 인기는 정말 하늘을 찔렀다. 그 도시, 그 동네 전체가 난리가 났었다. 상희구 시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서커스단의 기기묘묘한 몸짓 언어가 아니었다.

천막 한 모퉁이에 널어놓았던 단원들의 형형색색의 빨래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 그리고 목에 쇠오랏줄을 매고 있던 불쌍한 원숭이 한 마리였다.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것들의 애잔함, 쓸쓸함, 누추함 뭐 그런 것들이었다.

서커스단을 다룬 영화가 참으로 많은데 '위대한 쇼맨'은 아주 화려했지만 이탈리아 영화 '길(페데리코 펠리니의 명작)', 한국 영화 '부초(한수산 원작)', 미국 영화 '지상 최대의 서커스(멜로 드라마의 거장 헨리 해서웨이 감독)' 등을 보면 떠돌이 인간 집단의 욕망과 애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사진 | 황금알 제공]

인도 영화 '더 그레이트 서커스(인도가 자랑하는 두 배우 아미르 칸과 카트리나 카이프가 출연)'는 이들 영화와는 아주 다르게, 액션과 범죄물로 다뤘다. 남사당패를 다룬 한국 영화의 고전 '왕의 남자'도 어찌 보면 서커스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지방의 사투리, 인물, 사건, 곳곳을 탐색한 시집을 무려 10권이나 낸 상희구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대구」는 장소와 사투리를 다뤘는데 이 시는 칠성동 신천 강변에서 펼쳐지곤 했던 동춘 서커스단을 관람한 기억을 더듬어서 썼다. 단원들의 의복 빨래와 트럼펫 소리와 원숭이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밝혔는데, 서커스 자체보다도 그 이면을 들여다본 것이 참 특이했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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