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남 vs 보스턴…바이오산업 생태계에서 VC와 자본시장의 역할
신약개발 바이오텍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연구개발 능력이다.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임상 등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이 없으면 제아무리 뛰어난 약물도 허사가 되기 십상이다. 최근의 글로벌 투자 환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카이스트 바이오경영대학원은 올 상반기 바이오혁신 경영포럼에서 금융 환경 진단과 대안을 다룬다.
한경닷컴 바이오 전문 채널인 한경바이오인사이트는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강남스타일 vs 보스턴스타일: K-Bio 길은 어디에?), 박현우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심사역(IPO 그 이후: 국내상장시장에서 바이오섹터의 현주소), 스펜서 남 KSV글로벌 파트너(미국의 바이오산업 자본시장: 서부활극이 탄생시킨 유토피아), 이승우 데브시스터즈벤처스 상무(한국 바이오텍 성장모델과 벤처캐피털의 역할), 김태억 크로스포인트 테라퓨틱스 대표(빅파마 성장을 위한 금융생태계 진단과 모색) 등 포럼 강연자의 강연 내용을 연재한다.
바이오 스타트업이 지닌 독특한 특성은 바이오 생태계에 해결이 필요한 여러 과제를 제기한다. 미국의 제도적 시스템은 나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한국의 바이오 생태계는 아직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향후 벤처캐피탈과 주식시장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미국과 한국의 제도적 차이를 비교해 한국 바이오 시장이 직면한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인가, 주식시장의 천덕꾸러기인가
1976년 유전자 재조합 기술의 상업화를 위해 제넨텍(Genentech)이 창업된 이후, 바이오 스타트업은 신약개발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98~2007년 사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은 252개의 신약 중 34%가 바이오 스타트업을 거쳐 개발됐고 혁신적인 신약의 경우 그 비중이 48%로 늘어났다[그림 1].
이들이 개발한 신약은 기업에게는 수익원의 의미를 지니지만, 환자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같이 고마운 존재이다. 무엇보다도 신약개발의 생산성 하락으로 글로벌 제약업계의 고민이 깊을 때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새로운 혁신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혁신의 저수지 역할을 해왔다.
이같이 신약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이오 스타트업은 주로 벤처캐피탈(VC) 투자, 거대 제약회사와의 제휴(기술이전, 공동연구 등), 기업 공개(IPO)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이후 바이오 스타트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피사노 교수는 바이오 스타트업의 낮은 수익성,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개발을 기다려주는 인내 자본의 부족, 기업과 주식시장 투자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보완할 조직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봤다.
국내에서도 기술특례상장 제도를 통해 적자 상태에서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들이 시간이 지나도 수익성이 좋아지지 않는 문제가 지적된다. 기술특례상장 기업의 대다수가 바이오 기업이기 때문에 이는 바이오 스타트업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테크와 바이오는 다르다
자본시장에서 바이오 기업이 겪는 이러한 문제는 IT 분야의 테크 스타트업과 바이오 스타트업의 차이에 그 원인이 있다[표 1]. 우선 신약 개발이 지닌 본원적 불확실성이 바이오 스타트업을 일반 테크 스타트업과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신약 하나를 성공시키는데 약 2조원(15억 달러)이 소요되고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임상에 진입한 후보물질 중 10%만이 최종 허가를 받는다. 제품 개발을 시작하면 시장에서 잘 팔리든 못 팔리든 결과물이 나오는 다른 제조업과 달리 신약은 제품이 개발될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는 엄청난 위험 부담이다. 신약개발의 근원적 불확실성 외에도 초기 투자 규모가 크고 10년 이상의 장기 투자가 필요한 것, 주식시장에서의 정보 비대칭성이 크다는 것, 적자 상장이 일반적이고 VC 투자 자금을 회수할 때까지도 매출이나 순이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장기간의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지만 성공 확률이 낮기 때문에 유망한 프로젝트의 성공만큼이나 부실한 프로젝트의 조기 실패도 중요하다는 것 등이 테크 스타트업과 다른 점들이다.
위험 관리와 조기 실패
테크와 다른 바이오의 특성들은 몇 가지 해결과제를 제시하는데, 신약 개발의 본원적 불확실성에서 파생된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여러 개의 후보물질을 병행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고 VC 관점에서는 여러 기업에 분산 투자해서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금력이 취약한 개별 스타트업은 위험 분산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VC는 더 많은 자금으로 다수 기업에 분산 투자하기 때문에 위험 분산이 더 용이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바이오 스타트업 생태계는 창업자와 더불어 VC가 보다 적극적인 혁신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VC의 경영지배 목적의 투자가 가능한 것이 더 좋은데, 미국은 이와 관련한 아무 규제가 없다. 반면 한국은 법으로 이를 제한하고 있고 VC도 스타트업의 경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관행으로 정착돼 있다. 그 결과 생태계 전체로 볼 때 VC가 주도하는 위험 관리 기능이 미국보다 한국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VC가 스타트업의 경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신속한 실패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미국은 VC가 이사회에 적극 참여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함께하는 이사회 중심 경영이 정착돼 있다. 반면 한국은 창업자가 모든 의사결정을 하고 이사회는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창업자 중심 경영이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기업 지배구조의 차이는 기업이 잘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임상이 중단되고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문제가 된다. 한국의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무리하게 임상 3상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주가가 10분의 1로 하락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창업자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가 객관적이고 냉정한 의사결정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이사회 중심 경영이 정착돼 있다면 한국 바이오 기업들의 큰 실패 사례는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투자, 장기간의 적자
바이오 기업은 장기간의 적자를 유지하면서도 신약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계속 조달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자 상태에서도 주식시장 상장이 가능해야 한다. 바이오 기업은 10년 이상 적자가 지속되는 경우도 많은데 VC 펀드의 운용 기한은 보통 8~10년 정도이고 대체로 투자 후 4~5년 이내에 투자금을 회수한다.
이 때문에 초기 투자자들에게 회수 경로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적자 상태라도 신약 개발 도중에 인수합병(M&A)이 되거나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초기 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고, 바이오 스타트업은 추가 자금을 조달해서 신약 개발을 지속할 수 있다.
미국은 거래소가 최소한의 자격 요건만 심사하고 상장 주관사(underwriter)가 판단해 주식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기업 공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적자 상장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여기서 주관사의 판단 기준은 해당 기업의 주식을 발행했을 때 투자자들이 기꺼이 적정한 가격으로 그 주식을 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기업이 매출이 없더라도 투자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면 기업 공개를 하고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이때 주식 발행의 리스크는 주관사가 부담한다.
이런 제도 때문에 미국 주식시장은 적자 상장이 일반화돼 있다. 플로리다 대학의 제이 리터(Jay R. Ritter) 교수가 매년 발표하는 ‘기업공개-업데이트 통계(Initial Public Offerings: Updated Statistics)’ 최신판에 따르면 1980년~2023년 사이 뉴욕증시(NYSE)와 나스닥에 주당 5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상장한 9181개 기업 중 적자 기업은 42%였다[그림 2].
이 비중은 닷컴 버블이 있던 2000년 81%까지 치솟았다가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29%로 떨어졌으나, 그 후 다시 증가해 2018년 81%에 도달했다. 미국의 IPO는 대다수가 적자 상장인 셈이다.
적자 상장 증가의 1등 공신은 바이오 기업이다. 리터 교수는 9181개 상장 기업을 테크(인터넷 및 기타 기술 분야, 3320개), 바이오(바이오와 제약, 1000개), 기타(4861개)의 세 그룹으로 나눴다. 테크와 기타 분야의 적자 상장 비중은 각각 53%와 25%인 반면, 바이오는 90%나 된다. 지난 44년 동안 미국 증시에 상장된 바이오 기업 1000개 중 900개가 적자 상태에서 상장됐다는 의미이다. 상장 시점의 매출액 중간값(2022년 구매력 기준)은 테크 4690만 달러, 기타 1억3520만 달러인 반면 바이오는 14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1000개의 상장 바이오 기업 중 393개는 상장 시점에서 매출액이 0달러였다.
바이오 기업은 상장 후에도 수년간 적자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적자 기간이 10년을 넘기는 경우도 많다. 타미플루로 유명한 길리어드사이언스는 1987년 설립 후 1992년 IPO를 했지만 순이익이 흑자로 돌아선 것은 설립 후 14년, 상장 후 9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그림 3]. 이런 패턴은 바이오 기업들에서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고 일반적인 모습이다.
길리어드사이언스는 그 후 에이즈(AIDS)와 C형 간염 시장을 석권하면서 한때 매출 기준 글로벌 6위까지 상승할 정도로(2022년은 12위) 거대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길리어드 같은 기업은 소수이고 적자 상태에서 그대로 망하는 기업도 많다.
그렇다면 주식시장의 투자자들은 무엇을 보고 바이오 기업에 투자할까? 2010~2020년 사이 미국 상장한 모든 기업들의 주가 수익률을 조사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전체 기업을 3년 주가 수익률 기준으로 10분위 그룹으로 나누었을 때 상위 3개 그룹(1~3분위)만 시장 수익률을 초과했고, 나머지 7개 그룹(4~10분위)은 시장 수익률을 하회했다[그림 4].
그런데 상위 10% 이내의 기업은 3년 후 시장 수익률 대비 300%가 넘는 수익률을 보여줬다. 이런 결과를 보면 주식시장 투자자들도 기본적으로는 VC와 마찬가지로 여러 기업에 분산 투자를 해서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기업 분석을 통해 상위 10%에 속하는 기업들을 잘 선별해서 투자할 수 있다면 시장 수익률을 초과하는 좋은 투자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이 주식시장 투자자들이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는 동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한국은 거래소가 직접 기업을 심사해서 상장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고 흑자 상장이 원칙이었다. 여기에 기술평가 특례(2005), 성장성 추천 특례(2016), 이익미실현기업 특례(테슬라 상장)(2016) 제도가 차례로 추가되면서 적자 기업도 상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5년부터 2023년까지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 1236개 중 이 특례들을 이용해 상장한 기업은 206개로 전체의 16.7%에 해당한다. 적자 상장 제도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적자 상장 비율이 80%를 넘기도 했던 나스닥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장 제도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상장 유지 조건이다. 최근 3개 사업연도 중 2개 사업연도에서 10억원 이상 법인세비용차감전 계속사업손실이 발생하는 동시에 손실이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는 경우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하지만 특례 상장 기업은 3년간 유예된다. 또한 최근 사업연도의 매출액이 30억원 미만이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지만, 특례 상장 기업은 5년간 이 규정의 적용이 유예된다. 이는 매출이나 이익 기준의 상장유지 조건이 3~5년 동안만 적용되지 않고 그 후에는 적용받는다는 뜻이다.
다만 신약개발 기업들은 10년 이상 적자가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장 유지 조건은 바이오 기업의 특성에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상장 유지를 위한 매출과 이익 조건이 없다. 길리어드 사례에서 보듯이 상장 후 10년씩 적자를 유지하는 경우가 오히려 보편적이다. 우리나라도 바이오 기업들을 더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길리어드는 상장 후 9년 동안 적자를 지속했지만, 현재 매출 기준 글로벌 12위의 거대 제약사로 성장했다. 우리가 현재의 상장 유지 조건을 고수한다면 장래에 길리어드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바이오 기업들의 앞길을 막게 된다.
주식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
신약 개발 기업은 매출이 없기 때문에 제품 개발의 진척도가 기업 가치를 결정한다. 그런데 제품 개발의 진척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임상 데이터는 공개를 해도 일반 개인투자자가 해석하기 어렵고 전문가들도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신약 개발 기업의 내부에서 공유되는 정보와 외부 투자자들에게 제공되는 정보 사이에 비대칭성이 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가진 애널리스트가 객관적인 리포트를 발간하고 매도 리포트를 발간해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 공매도 제도를 통해 기업들이 임상시험 결과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일반 투자자들이 투자의 위험을 분산하면서 상위 10%에 해당하는 실적을 낼 기업들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ETF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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