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배우고 즐기고…“우리만의 안식처가 필요해”

한겨레 2024. 4.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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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전용 공간들
단순이용자에서 주체자로 유도
운영진에 회의비, 알바비도 지급
청소년 대상으로 사업설명회도
공간 필요성에 시민들 힘 보태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집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단연 학교와 학원이다. 한창 ‘공부할 나이’로 여겨지는 시기이니 학업 공간이면 충분한 걸까.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편안히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있다 해도 청소년의 욕구가 적극 반영되기보다는 어른들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정작 청소년들에게 외면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청소년이 단순히 애용하는 것을 넘어 청소년이 주인으로 자리하는 공간들은 어디에 무엇이 있으며,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경남 산청읍에 있는 명왕성은 준비 단계부터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업 설명회를 열면서 청소년들이 원하는 공간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난해 명왕성 5주년 행사에 참여한 청소년들. 명왕성 제공

산청군 청소년들의 보금자리

경남 산청군 산청읍에 자리한 청소년 자치공간 명왕성(이하 명왕성)은 청소년들을 단순 이용자가 아닌 주체로 끌어당겼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곳이다. 영어 교사로 일하던 김한범 코디네이터는 교직 생활을 그만둔 후 산청군에 정착하면서 2018년 명왕성을 개관했다. 준비 단계부터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업 설명회를 열면서 청소년들이 원하는 공간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과정을 거쳤다. 공간의 필요성에 공감한 시민들이 후원으로 힘을 보탰다.

그렇게 완성된 명왕성은 누릴 공간이 특히 더 부족했던 산청 지역 청소년들에게 지난 6년간 편안한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명왕성에서 편하게 수다를 떨며 쉬기도 하고, 합주 연습을 하기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거나 참여하기도 한다.

이 모든 명왕성의 움직임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 역시 청소년들의 몫이다. 운영진을 맡은 청소년들은 월 1회 회의를 통해 명왕성의 운영 상황을 공유하고, 크고 작은 결정을 직접 한다. 정기회의에 참여하는 운영진에게는 소정의 회의비하도 지급된다. 청소년의 노동도 엄연한 노동인데, 무급을 기본값으로 두는 관행을 깨기 위해서다.

명왕성만의 프로젝트도 다양하다. 그중 2019년 시작한 ‘꿀알바’ 프로젝트는 청소년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들의 결과물을 노동으로 인정해 보수를 지급한다. 꿀알바의 활동 범위는 크게 지역 단체에서 의뢰한 일을 맡아서 하는 지역 연계 활동, 공적 가치를 지닌 일에 관여하는 공익 활동, 그림 그리기나 악기 연주 같은 개인 활동으로 나뉜다. 그중 개인 활동은 혼자 창작이나 연습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결과물을 올리거나 촬영하는 등 타인과 공유하는 형식을 갖출 때 꿀알바로 인정된다. 꿀알바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들은 좋아하는 일을 탐색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통해 활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자존감을 높여나간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명왕성을 꾸준하게 이용하다 올해는 운영진까지 맡은 김우종(산청고 1) 학생은 “산청에는 친구들과 놀거리가 많이 없는데, 카페가 아닌 곳에서 수다도 떨고 게임도 하고 데이트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명왕성은 일상생활의 쉼터이자 나를 위로해주는 활력소”라면서 명왕성 공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청소년들이 직접 공간 운영에 관여하고, 새로운 실험을 해나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해본 적 없는 경험에 좌충우돌할 때도 많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그 모든 경험을 통해서, 아이들은 스스로 궤도를 수정하고 자기 자리를 찾는 연습을 하고 있다.

경기 성남에 있는 공공도서관 라이브러리 티티섬 10층 더티랩에서 한 청소년이 작업을 하고 있다. 라이브러리 티티섬 제공

서가, 작업실, 연습실, 비밀공간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트윈(12~16살)과 틴(17~19살) 중심의 공공도서관 라이브러리 티티섬 역시 청소년이 입시 위주의 정형화된 일상을 벗어나 자기 주도권을 갖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비영리단체 도서문화재단씨앗이 2021년 설립한 라이브러리 티티섬은 인근에 9개 초중고가 모여 있는 성남시 중원구에 자리 잡고 있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도심 건물의 9층부터 12층까지 총 4개 층을 사용하며, 연령대와 관계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부터 트윈 세대만 이용 가능한 전용 공간, 틴 세대 전용 공간, 트윈&틴 전용공간으로 세분화돼 있다.

청소년들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감각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분이다. 공간 구성 역시 서가 공간, 전동 드릴부터 색색의 물감까지 다양한 도구와 재료가 구비된 작업실, 합주 및 안무 연습이 가능한 연습실, 삼삼오오 모여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 작물을 키워 수확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텃밭,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비밀 공간까지 매우 다채롭다.

설계 단계부터 청소년들의 의견을 사전 청취해서 적극 녹여낸 라이브러리 티티섬을 완성하는 것은 공간의 주인인 청소년들이다. 라이브러리 티티섬은 청소년들의 자기 결정권을 매우 중요시한다. 조은정 관장은 “청소년들이 충분히 존중감과 자율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지 고민하면서 공간과 콘텐츠 전반에 녹여내려고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하고 책임지는 과정에서, 시야도 확장되고 역량도 길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티티섬에서 청소년들이 그런 기회를 많이 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라이브러리 티티섬의 운영 철학을 설명한다.

청소년이 주체로 머물 수 있기 때문일까. 학업에 바쁜 청소년들이 얼마나 도서관을 이용할까 했던 초기 우려와 달리, 라이브러리 티티섬은 해마다 꾸준히 이용자가 늘면서 지역 청소년들의 편안하고 든든한 아지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청소년 공간 운영의 긍정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라이브러리 티티섬의 최종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 전용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조은정 관장은 “청소년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더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청소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공간이 별로 없다 보니 이런 공간은 꼭 필요하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전용 공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청소년들이 어디에서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한편, 도서문화재단씨앗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청소년들이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확장하는 기회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청소년 중심 공공도서관을 만드는 ‘space T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공공도서관과의 협업을 통해 2018년 전북 전주시립도서관 내 ‘우주로1216’ 개관을 시작으로 경기 수원시 슬기샘어린이도서관의 ‘트윈웨이브’, 충남 세종시립도서관의 ‘이도’, 대구2·28기념학생도서관의 ‘그린대로’ 등 공공도서관 내 청소년 전용 공간을 조성했으며 2023년 12월에는 서울 영등포구 선유도서관 내 ‘사이로’를 추가로 열었다. 라이브러리 티티섬은 수~토요일(월·화·일요일을 포함한 공휴일 휴무) 오후 1시부터 저녁 9시까지 운영한다.

가재울광장에서 드론 시뮬레이터 체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 가재울청소년메타센터 제공

디지털 기술 활용 공간도 마련

지난해 9월 개관한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청소년메타센터 역시 지역 청소년들의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청소년이 찾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놀이’가 가능해야 한다는 철학 아래, 10대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게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해 공간을 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총 4층 규모인 가재울청소년메타센터 1층으로 들어서면 플레이스테이션 및 엑스박스(Xbox)를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과 라운지, 마당을 만날 수 있다. 2층은 코딩이나 3D 메이킹을 할 수 있는 메타플레이스, 4차 산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이(E)-룸 등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한 공간들로 이뤄져 있다.

3층에는 청소년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준비돼 있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체력을 단련할 수 있는 디지털 스포츠존, 방송 장비를 활용해 영상 촬영부터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지(G)-스튜디오, 악기 합주가 가능한 밴드 스튜디오, 그 밖에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가능한 동아리실 등이다.

4층은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나 프로그램할 수 있는 공간과 옥상 공간 등으로 조성돼 있다. 이 공간에서는 농구 동아리, 음악 밴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체육활동 모임 등 동아리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 지역 연계 활동 및 프로그램도 꾸준히 기획되고 있다.

한편, 가재울청소년메타센터 역시 청소년운영위원회 운영을 통해 공간 사용자인 청소년들이 위원 자격을 갖추고 시설 운영 및 프로그램에 의견을 내고 모니터링을 하도록 하고 있다. 청소년이 원하는 청소년을 위한 공간의 기본 요건인, 청소년의 자기 주도권이 주어지고 있는 셈이다. 가재울청소년메타센터는 화~토요일 오전 9~저녁 9시, 일요일 오전 9~오후 6시 운영하며 이용 대상은 9살 이상 24살 이하 청소년이다.

박은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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