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면 신뢰간다”…‘기록 있는 나라’ 터 닦은 참여정부

한겨레 2024. 4. 2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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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중요사건 기록해 달라” 당부
“인수위 첫날부터 일기 쓴다” 답변
청와대 기록 시스템 ‘이(e)지원’ 개발
노 대통령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
기록 중시·정보 체계적 관리 강조
자료축적 넘어서 국정에 실제 활용
비밀주의 대신 과감한 공개 선택
참여정부 기록 825만건 생산·이관
이승만~김대중 정부 합친 것 20배
후임 정부도 기록문화 거부 못해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64화 기록의 중요성

2008년 1월22일 노무현 대통령이 문재인 비서실장, 성경륭 정책실장 등과 함께 대통령기록관을 방문, 업무보고를 듣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8월10일(일) 또 비오다. 올여름은 노상 비 내리고 언제 더위가 올지 모르겠다. 2003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내가 경북대 조교수 시절 통근버스에서 사범대학 일반사회과의 원로 금종우 교수가 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물었다. 조정 정(廷), 비 우(雨)라고 답하니 금 교수가 말했다. “이 교수는 나중에 정부에 가서 큰 벼슬을 할 거요.” “아니 왜 그렇습니까?” “조정에 비를 내리는 이름이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웃어넘겼는데 뜻밖에도 20년 뒤 금 교수의 예언이 적중했다. 내가 청와대에서 일하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만큼 그 해엔 비가 많이 왔다.

저녁 6시 반, 관저에 가서 대통령과 단독 식사를 했다. 내가 소응접실에서 기다리며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책을 읽고 있는데, 노 대통령이 들어오더니 항상 그렇듯 책에 관심을 갖고 질문을 했다. 이 책 내용 중에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사망자가 모두 폴 포트 책임은 아니고 그 중 60~80만명은 미군 폭격으로 인한 사망이란 사실을 노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나는 청와대 일할 때도 늘 책을 끼고 다녔다. 처음에는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꺼내 읽었는데 교수 시절 몸에 밴 버릇이다. 그랬더니 하루는 양길승 부속실장이 “높은 사람은 원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법이 아닙니다”라고 말렸다. 그리고 보안검색 때문에 가방을 들고 다니면 불편해 그 뒤로는 책만 달랑 들고 다녔다. 언젠가 기자들이 나에게 청와대 일하며 책을 얼마나 읽는지 묻기에 지난 1년간 100권밖에 못 읽었다고 하니 자기들보다 더 많이 읽었다고 놀랐다.

노 대통령이 지난 수석회의에서 화제에 올랐던 협동조합으로 유명한 스페인 몬드라곤 마을에 대해 묻기에 내가 협동조합 이론, 튜간 바라노프스키의 협동조합 쇠퇴론, 유럽·미국의 협동조합 현실을 설명했다. 나는 경북대 경제통상학부에 ‘경제민주주의’ 과목을 신설해 여러 해 강의를 해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내 전공이다. 노 대통령이 말했다. “학자 출신은 크게 보는 대신 실무에 약하고, 관료 출신은 실무는 강하지만 크게 보는 눈이 부족하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노 대통령과 동북아위원회, 부동산, 주택 문제, 교육, 사회안전망을 화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8시가 되자 노 대통령이 글 쓸 게 있다고 해서 일어서서 나오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물었다. “정책실장을 반년 해보니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이대로 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 있다고 하면 어폐가 있겠지만 적어도 과거 여러 정부보다는 잘할 것 같습니다. 지금 장관들 인선이 잘 됐고 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꾸준히 가면 내년쯤엔 성과가 나타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노 대통령이 “중요한 사건은 기록해두세요”라고 당부하기에 안 그래도 인수위 첫날부터 일기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밖에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문밖까지 배웅해주며 “일요일 쉬는데 나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하여튼 정책 쪽은 꽉 장악해서 잘해 주십시오”라고 하기에 “예,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물러 나왔다.

8월25일(월) 저녁 7시 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의 에드 베이커 부소장이 한국에 와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롯데 호텔). 베이커 선생은 한국 민주화의 숨은 공로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도 김대중 조력자로 등장하는 정의파 변호사다. 내가 유학 시절 옌칭연구소 장학금을 5년간 받았으므로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다. 헤어질 때 충고를 한마디 해달라고 하니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라, 그리고 일기를 쓰라”고 충고했다.

2004년 2월7일 이지원(e知園) 활용에 관한 보고회에서 관계자의 보고를 받는 노무현 대통령. 대통령 뒤에서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이 메모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4년 2월7일(토) 9~12시 ‘이(e)지원’ 보고회에 수석부터 행정관까지 4백명이 모였다(영빈관). 차현진 등 4명이 보고한 뒤 참석자들에게 뭐든 질문하라 하니 조윤제 경제보좌관만 질문하고 모두 침묵이다. 9시 반부터 90분간 대통령 혼자 발언했다. 화면을 바꿔가며 크고 작은 것을 일일이 지적하는데 지식이 놀라웠다. 11시40분 보고회를 마치자 모두 박수치며 해방된 기쁜 얼굴로 일어서려는데 노 대통령이 너무 오래 이야기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다시 ‘이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0분을 더 연설했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 정보화에 관심이 많아 전문가를 불러 토론하고 더 나은 방식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이지원’이다. 설명회에서도 수석, 직원들은 대개 시큰둥한데 대통령이 가장 열성적으로 토론에 임했다.

4월20일(화) 날씨 쾌청, 9시~11:10 대통령 탄핵 중 관저 방문(위원장 보고 시리즈 세 번째). 배순훈, 김안제, 전성은, 장원석, 조재희, 박남춘과 내가 참석했다. 모든 걸 기록하는 기록광 김안제 신행정수도추진위원장이, “청와대에는 몇 번 왔지만 관저는 오늘 처음이고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오늘 돌아가서 기록하실 거지요?”라며 지난번 선물로 받은 2천 페이지짜리 ‘김안제 평생기록’을 화제로 올렸다. 김안제 위원장은 그 책이 부산대와 몇 대학 사회학과에서 부교재로 채택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나를 향해서, “보니까 이 위원장도 매일 기록을 열심히 하고 있던데요.” “예, 제가 평생 일기를 써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5월10일(월) 12~2시 관저 오찬. 최초로 구속된 육군대장 신일순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노 대통령이 몽테스키외의 말을 인용했다. “이성적인 군인은 도망갈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심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니 싸우는 것이다. 김우식 비서실장이 예전 노무현의 부기 합격증이 경매에 올라 850만원에서 1억원까지 올라갔는데 경매가 중지됐다고 말했다. 부산상고 다닐 때 살던 집 주인이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나중에 대통령기념관에 진열할 물건이니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는데 내가 메모를 하고 있으니 노 대통령이 내 메모지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거 다 적어서 언제 써먹을 겁니까?”라고 농담을 했다. 모두 웃으며 일어섰다. 2005년 2월25일(금) 참여정부 2주년 기념 오찬(인왕실)에서 노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김우식 비서실장을 발탁한 이유는 열심히 메모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메모를 하면 품위는 없으나 신뢰가 간다.”

2008년 1월22일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해 전시실을 둘러보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노무현사료관 제공

노 대통령은 기록을 매우 중시하고, 정보의 체계적 관리를 강조했다. 참여정부 내내 정보체계의 디지털화에 노력해서 ‘이지원’을 만들어 국정운영에 직접 활용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산된 수많은 자료를 축적해 후대에 남겼다. 과거 정부는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과거 조선시대 숱한 사화에서 보듯이 기록을 남긴 것이 오히려 큰 화근이 되는 것을 보고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국정원이 갖고 있던 자료를 한꺼번에 소각해 시커먼 연기가 몇 시간 동안 하늘을 뒤덮었다고 하는 목격담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은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었겠는가. 야만의 시대였다.

2008년 1월22일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해 대통령기록물서고를 관람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노무현사료관 제공

현대는 정보의 시대라고 하듯이 정보의 체계적 축적과 활용이 정부를 포함한 모든 조직에 필수적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시대적 추세를 잘 파악해서 과거의 나쁜 관례를 타파하고 모든 사실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공개하는 새로운 국정운영 방식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참여정부는 역대 정부의 비밀주의를 따르지 않고 과감히 공개주의를 택했다. 참여정부가 끝났을 때 남긴 정부 기록물의 건수는 825만 건이었다. 이승만부터 김대중까지 모든 정부의 전체 기록을 다 합한 35만 건의 20배 이상이었으니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뒤를 이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참여정부를 부정하고 폄훼하면서도 기록문화만은 거부하지 못하고 계승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기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도 참여정부의 중요한 공로였다. 나의 ‘참여정부 천일야화’도 당시 기록을 해두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끝)

※그동안 ‘참여정부 천일야화’를 집필해 온 이정우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부터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인권의 발견’을 주제로 ‘길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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