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공원’에서 이승만·이건희·주차장은 빼라
전문가들 “역사·균형발전·환경·교통·조경 관점에서 재검토 필요”
2024년 4월19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16개 독립운동·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김영배, 오기형 의원, 곽상언 당선자 등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우리 국민은 제22대 총선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역사 퇴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다. 이제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이승만기념관은 물론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그 어떤 우상화와 미화 작업에서도 당장 손을 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이 추진 중인 ‘이승만기념관’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하 송현공원) 안 건립을 지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설익은 발언
같은 날 불교계에서도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회장 최승태)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송현공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은 불교계를 범죄의 소굴로 몰고 ‘정화 유시’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분열과 갈등의 나락으로 몰아간 장본인이다. 그런데 송현광장(송현공원)은 4·19혁명 당시 경무대(청와대)로 가는 길목이며, 조계종과 태고종 (사찰) 등 불교계와 이웃하고 있다. 이런 공간에 이승만기념관을 짓는 것은 불교계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밝혔다.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는 미국에서도 나왔다. 안창호, 박은식, 심훈 등 11명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오늘날 이승만에 대해 많은 사료에 근거한 평가는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실패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동안 축적된 여러 사료들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명백한 증거들로 넘쳐난다. 이승만을 독립운동 영웅으로 기념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이며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만기념관 송현공원 안 건립 논란은 2024년 2월23일 오세훈 서울시장의 발언으로 불거졌다. 당시 오 시장은 “현재 (이승만기념관 건립) 가능성이 가장 높게 거론되는 곳이 송현광장”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앞서 2023년 11월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500만원의 성금을 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역사, 불교, 천주교, 동포 단체들은 3·15의거일과 4·19혁명일에 잇따라 한목소리로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3월14일 보도자료에서 서울시는 “올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서 기념관 입지와 관련해 서울시에 공식 제안하거나 협의한 바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이승만기념관의 송현동 부지 입지에 대해 결정된 바 없다”는 원론적 의견을 밝혔다.
반대 운동에 참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기획실장은 “시민단체의 반대 운동이나 최근 총선에서 여당이 대패한 이후 이승만기념관 송현동 건립은 조금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중앙정부나 서울시가 이 사업 지원 방침을 취소하지 않고 있어 지속적인 반대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 사업을 추진 중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의 익명을 요청한 한 관계자는 “송현동은 청와대와 가까운 대한민국의 상징적 공간이어서 이승만기념관 후보지 가운데 일순위다. 이승만기념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공정히 다뤄서 국민을 통합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5월 중에 좀더 구체적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기념재단은 2024년 4월25일까지 건립 기금으로 120억원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건희기증관 서울 유치, 일방적 결정
오 시장의 발언으로 불붙은 송현공원 안 이승만기념관 반대 운동은 이제 ‘송현공원 지키기’ 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도심의 거의 유일한 평지 공원인 송현공원엔 이승만기념관 말고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건희기증관, 서울시의 대규모 지하주차장 건설이 함께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가장 먼저 송현공원 터를 차지한 시설은 문체부의 이건희기증관이다. 문체부는 서울시 소유 송현공원 터 3만7141㎡ 가운데 동쪽 9787㎡를 서울시와 협의해 국유지와 교환했다. 문체부는 이 터에 2028년까지 1416억원을 들여 연면적 2만5천㎡의 이건희기증관을 지을 계획이다. 문체부는 2024년 상반기에 설계 공모를 한 뒤 2025년 하반기까지 실시 설계를 마치고 이르면 2025년 하반기에 착공할 계획이다.
그다음으로 송현공원 터를 차지한 시설은 2022년 10월 발표된 서울시의 대규모 지하주차장이다. 이 지하주차장은 이건희기증관을 제외한 송현공원 터 2만5973㎡에 지하 2층으로 들어서며 주차 면수는 450면, 연면적은 2만6623㎡에 이른다. 주로 지역 주민이 아니라 관광객, 방문자를 위한 시설이다. 주차장도 이건희기증관과 시기를 맞춰 2025년 하반기까지 실시 설계를 마치고 착공해 2028년 완공될 예정이다. 두 사업이 착공되는 2025년 하반기엔 송현공원 전체가 폐쇄되고 파헤쳐진다.
두 사업이 본격화하자 시민단체들은 연대단체인 ‘서울워치’의 4월26일 정기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서울워치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서울환경연합, 문화연대, 녹색교통, 함께하는시민행동, 정보공개센터 등이 참여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가장 먼저 문제 삼는 것은 이건희기증관 건립이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문재인 정부에 의해 졸속으로 결정됐다는 점이다. 2021년 4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가족이 2만3천여 점의 미술품 등을 기증했고, 곧바로 정부는 기존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활용하는 대신 이건희기증관을 따로 짓겠다고 결정했다. 송현공원 터는 2000년 삼성생명이 미국 정부로부터 사들여 삼성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정부의 반대로 포기한 곳이다.
특히 정부는 이 회장 유가족이 기증품을 시대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나눠 기증했고, 기증품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한곳에 모으기로 했다. 반면, 당시 미술계의 다수는 기존의 국립박물관(고대~조선)과 국립현대미술관(근대~현대)을 활용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국립근대미술관을 신설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연대 김재상 사무처장은 “지금 같은 막무가내식 진행은 시민의 민주주의 권리를 명백히 침해한다. 이제라도 문체부와 서울시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화 사업은 단순한 시설 건축 사업이 아니라, 각 지역 시민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지를 살피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문재인 정부는 전국에서 40여 개 도시가 이건희기증관 유치를 신청했음에도 공론화 과정 없이 석 달 만인 2021년 7월 서울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넉 달 뒤인 2021년 11월엔 송현동으로 확정했다. 이 전 회장의 풍부한 기증품을 균형발전 차원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음에도 굳이 서울로 결정했다. 전국에서 유치를 신청한 도시가 너무 많아 조정하기 어렵다는 무성의한 이유였다.
주차상한제 대신 주차장 확대 ‘모순’
국립미술관은 전국에 4곳이 있는데, 그중 서울 2곳, 과천 1곳 등 3곳이 수도권에 있다. 지방엔 청주 1곳뿐이다. 심지어 이건희기증관 바로 옆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5만2천㎡)이 자리잡고 있다. 김재상 처장은 “<2023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을 보면, 국내 주요 도시의 미술관은 서울에 43곳이고, 부산 9곳, 대구 4곳, 인천 5곳, 광주 15곳, 대전 5곳, 울산 1곳, 세종 0곳 등 그 격차가 극심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문재인 정부의 황희 문체부 장관은 “지역에서도 기증관 건립에 많은 관심을 보인 만큼 경상권, 호남권, 충청권 등 권역별로 문화시설 거점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박물관·미술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권역별 순회전시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국립미술관 건립이 검토 중인 지방 거점 도시는 대전(충청권)뿐이며 함께 거론된 광주, 대구, 창원 등은 이렇다 할 진척이 없다.
이민원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광주대 명예교수)은 “국가의 문화유산은 모든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현재 지방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소외된 상황이다. 문재인, 윤석열 정부가 모두 공공기관 2차 이전을 약속했으므로 신설 기관인 이건희기증관은 당연히 지방에 설치해야 한다. 과밀한 서울에 짓는 사업을 중단하고 3~4개 지방 거점 도시에 국립미술관을 신설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 차원에서도 송현동의 이건희기증관과 주차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3만7141㎡의 송현공원 터 가운데 1만㎡에 연면적 2만5천㎡ 규모의 이건희기증관, 나머지 2만6천㎡에 연면적 2만7천㎡ 규모의 지하주차장이 들어서려면 사실상 송현공원 전체가 파헤쳐진다. 이렇게 지하를 파고 거대한 구조물을 지으면 생태계나 물순환에 치명적 악영향을 준다. 최영 서울환경운동연합 생태도시팀장은 “송현공원은 서울 도심에 녹지와 공유지가 부족해서 많은 비용을 들여 토지를 확보한 곳이다.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고 녹지를 훼손하고 지하 공간을 파는 일은 본말이 뒤집힌 것이다. 결국 거대한 콘크리트 지하주차장으로 인해 빗물이 스미지 못해 지하수와 하천이 마를 것이다. 그 위의 나무들도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고 말했다.
“도시의 여백… 현재 상태가 최선” 의견도
전국 유일의 녹색교통진흥지역인 서울 사대문 안에 450면의 대규모 주차장을 신설하는 것도 모순된 일이다. 그동안 서울시는 사대문 안에선 승용차 통행을 억제하고 대중교통과 자전거, 보행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특히 송현공원 옆 율곡로는 상습적인 교통 정체 구역이어서 450면의 주차장을 만들면 교통 정체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녹색교통 김광일 사무처장은 “송현공원은 주변에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등 대중교통 인프라가 아주 좋은 곳이다. 또 부근에 1300면의 세종로 주차장이 있는데, 이용률이 낮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문화시설을 설치할 때는 주차상한제를 적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주차장을 늘리려고 한다. 서울시 녹색위원회를 통해 이 사업을 중단, 축소하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원 관점에서 보면 송현공원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조경학)는 “송현공원에 가보면 손댈 필요 없이 현재 상태가 가장 좋다. 백악과 인왕산, 도심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는 도시의 여백이다. 비어 있는 것이 공원의 다양한 활용에도 더 유리하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을 중단하고 이 공원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어떨까? 시민들에게서 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철 시시한연구소 공동소장은 “서울처럼 빽빽한 도시에선 공간의 여유가 필요한데, 오히려 오 시장은 무엇인가를 더 채우려고 한다. 오 시장이 개발하려는 송현공원과 혁신파크, 용산 철도 정비창 등 대규모 공유지를 묶어서 종합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 같다. 시민단체들이 공유지 대응 연대단체를 꾸리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건희기증관을 추진 중인 문체부의 강대금 지역문화정책관은 “문재인 정부가 이건희기증관 입지를 결정할 때도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송현동으로 결정됐다. 물론 지방에 국립미술관을 신설하면 환영할 일이고 균형발전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산을 결정하는 기획재정부의 판단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송현공원에 대규모 주차장과 건설을 추진 중인 서울시의 신선종 대변인은 “지하주차장에 대해 아직 시민단체에서 어떤 구체적 요구가 온 것은 아니다. 의견이 서울시에 온다면 해당 부서에서 검토해 대응하겠다”며 “이승만기념관은 추진 주체인 기념재단에서 제안이 온다면 논의해 검토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이 열 려 있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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