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보낼 수 없다 [신영전 칼럼]

한겨레 2024. 4. 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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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받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누사이라트 난민촌. AFP 연합뉴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이대로 보낼 수 없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뒤섞여 뿌연 아침에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에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출근길에 열어본 전자편지함에는 어김없이 부고가 와 있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아침을 누군가의 부고로 시작한다. 시인 이산하의 시구처럼, “요즘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지인들의 부고 문자가 쌓인다”.

지난 17일,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젊은이의 어머니 정차순씨가 떠나셨다. 약속이나 한 듯 그다음날에는 평생 난민으로 살았던 ‘척탄병’ 홍세화 선생도 우리 곁을 떠났다.

왜 하필 4월일까? 배우이자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70여년 전, 제주 산간 마을 붉은 동백꽃잎이 1만4400번 넘게 떨어져 내린 날도 4월이었다. 60여년 전, 지름 5㎝, 길이 20㎝ 무장 폭도용 미제 고성능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열일곱살 주열이가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 위로 떠올랐던 날도 4월이었다. 하루 동안 하늘이 304번이나 무너져 내린 날도 10년 전 4월이었다. 1986년 23살 두 청년이 옥상에서 불붙은 꽃잎처럼 떨어지던 날도 4월이었다. 민주주의의 봄은 그냥 오지 않았다. 1980년 이후 19명의 대학생, 27명의 노동자가 산화했다.

하지만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문에 실리지도 않고, 내가 받지 못한 부고가 훨씬 많다. 오늘 하루 36.6명, 4월 한달 1천명이 스스로 삶을 중단했다. 이는 10만명당 23.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11.1명의 두배를 넘는 수치다. 20대 사망자 2명 중 1명이 이 길을 택했다. 최근 20~30대 여성들의 사망률이 급증하고 있다. 1980년대생 여성은 그녀의 어머니 세대보다 5배, 1990년대생 여성은 7배 더 높은 자살률을 보인다. 사회학자 이민아는 이 현상의 주요인으로 2018년부터 더욱 심화된 노동시장 내 청년 여성의 위기와 그로 인한 절망을 지목한다. 그러나 4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이들을 위한 정책은 없고 그저 혐오만 가득했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자살률이 아니라 2016, 2017년 두해를 제외하고 지난 20년간 부동의 세계 1위 자살률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적극적으로 개조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무감각과 무능이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이곳은 이미 지옥이다.

한국 현대사에 아프지 않은 날이 하루라도 있었던가? 그래도 나는 4월이 가장 아프다. 겨우내 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지 끝엔 연둣빛 새잎들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4월은 엄연한 우리의 비극과 절망을 외면한 채 헛된 희망을 품게 한다. “화려한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벌써 투전놀이에 바쁜 우리를 4월은 더욱 ‘극적으로’ 초라하게 만든다.

온 생애를 새 길을 찾아 헤맸던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선생이 말기 암 투병 속에서 “끝내 냉소와 좌절을 멀리하라고 자신에게 지운 다짐”으로 길어 올린 희망의 단어가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이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탐욕을 인간 스스로 다스려 공생의 도를 실현한다는 인간의 반란 프로젝트가 끝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없는 이에 대한 가진 자의 착취, 전쟁, 환경오염, 기후 위기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디스토피아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란 자연이 인간을 멸종시키는 방법밖에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이 엄연한 진실과 연둣빛 새싹이 공존하는 4월이야말로 얼마나 잔인한가?

이제 몇시간 남지 않은 2024년 4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뿐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무대 위에서 햄릿이 중얼거린 말을 흉내 내자면, ‘죽거나’ 아니면 ‘부끄러운 채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 더 있을지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인류의 시간을 ‘괴물처럼 살다 가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국민을 떠나서도 잘 살고, 의사가 환자를 떠나서도 잘 사는 것이다. 사장이 노동자가 죽든 살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다. 가자지구의 장례식이 3만3천번 이상 열리고, 그중 상당수가 어린이의 것이어도, 이제 신문의 1단 기사로도 실리지 않고, 우리는 그냥 아무 일 없는 듯 잘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면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겐 희망이 있는가? 그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냥 보낼 것인가? 나는 이대로 보낼 수 없다. 폭탄이 떨어져 번지는 가자지구의 시멘트 먼지 같은 이 매캐한 황사와 미세먼지 가득한 잔인한 4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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