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구해준 썰만 풀어도 먹고살 수 있다니… 참 사랑스러운 나라야[소설, 한국을 말하다2]

신재우 기자 2024. 4. 2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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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동식
돈 - 그분의 목숨을 구하다
일러스트 = 토끼도둑 작가

저번에 과학고 초청 강연에서 말이야. 알고 보니 문학상을 휩쓴 작가랑 나랑 둘 중 누구를 초청할지 학생 투표를 했었는데 내가 압도적으로 이긴 거더라고. 미리 알았으면 내가 양보했을 건데 말이지. 학생들한테 나 따위보다 그 작가가 훨씬 도움 됐을 거 아니야? 난 거기 안 갔어도 어차피 일정이 꽉 차서 시간이 모자랐었거든. 어휴, 사실은 지금도 난 내가 전문 강연자로 살고 있는 게 신기해.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배운 것도 없고, 배울 점도 없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말을 웃기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절대 전문 강연자가 될 수 없는 거잖아. 그런데도 그 어떤 강연자보다 폭발적인 반응이란 말이지. 특히 청소년들은, 평소 떠들고 딴짓만 하던 녀석들도 내 강연은 열광해서 듣는다니까. 못 믿겠어? 그쪽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무조건 장담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날은 말이야. 오랜만에 친구 놈들이랑 같이 놀러 가서 진탕 마시고 잠든 새벽이었어. 술을 잔뜩 퍼마신 녀석이 새벽에 나가서 안 들어오니까 걱정이 되잖아? 내가 녀석을 찾으러 나갔어. 좀 걷다 보니 저 멀리서 다급하게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이놈이 무슨 헛짓거리를 하나 싶어 얼른 가봤더니, 물에 빠져 죽을 둥 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 난 깜짝 놀라서 바로 뛰어들었는데, 아오 둘 다 죽을 뻔했어.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그래도 겨우겨우 구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아 글쎄 친구 놈이 아니지 뭐야? 생사람 목숨을 구한 거야 내가. 근데 놀랍게도 그 생사람이 누구였냐면 말이야…. 바로 그 A그룹의 그 회장님이었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그분’의 목숨을 구한 거라고. 정말 깜짝 놀랐어. ‘아니 이분이 왜 여기서 나와?’ 싶은 거지. 사람들이 그분을 모시고 떠날 때까지도 현실감이 잘 없더라고. 그러다 서서히 정신이 드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거야. 말하자면, 내가 그분의 ‘생명의 은인’이 된 거잖아? 생각해 봐. 그쪽이 만약 그분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됐어. 그럼 어떨 것 같아?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 같아? 솔직히 기대되지 않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지만, 떡 줄 사람도 떡 줄 사람 나름이지. 그분이라고 그분! 행복한 상상을 멈출 수가 없더라고.

난 조용히 그분의 연락을 기다렸어. 그런데 진정하고 보니까 막상 좀 막연한 거야. 분명 내 인생에 되게 좋은 일이 일어난 거 같기는 한데, 뭘 어떻게 좋은 일이지? 현실적으로 뭐가 잘 안 떠오르더라고. 아무래도 내가 좀 머리가 모자라서 그런 것 같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살릴 여러 계획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난 안 되더라고. 또 시간도 부족했고 말이야. 그분이 바로 이튿날 한번 뵙자고 초대했거든.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나가기로 했어. 평생 기름밥 먹던 머리에서 뭐가 나오겠어? 난 그분을 만나자마자 솔직하게 말했어. 직접적으로 돈을 달라고 말이야. 그냥 주고 싶으신 만큼 돈 좀 주고 치우시라고 해버렸지. 굉장히 무식하고 무례한 말이었지만, 솔직하게 진심을 말한 거였어. 근데 그게 통했나 봐. 솔직해서 좋다는 거야. 바로 그 자리에서 내게 이만큼을 주겠다며 적어주셨는데, 와! 진짜, 와!!

근데 대신에 그분이 한 가지를 부탁했어. 그날 새벽에 내가 목격한 것들을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야. 난 무조건 약속했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뭐, 어휴. 알다시피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놈의 술이 원수지. 아니 뭣 하러 갑자기 한턱낸답시고 술자리를 가졌는지 몰라 미친놈이. 필름이 끊기고 다음 날 오후에 일어났더니, 온 사방이 그 뉴스더라고. 친구한테만 보내줬던 기념사진은 또 어떻게 유출이 됐는지 아오! 그 자식은 지금도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니까.

핸드폰은 난리가 났고, 그쪽의 연락도 왔어. 나야 당연히 약속을 안 지킨 탓에 돈이 날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그냥 준다는 거야! 대신 말을 맞춰야 하니까 찾아오라더군. 무분별한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정리 좀 하자는 거였지. 알고 봤더니, 내가 정말 숨겨야 하는 부분은 누설을 안 했던 게지. 천만다행이지 뭐야. 난 바로 그쪽에 찾아갔고, 내가 쓸데없이 떠들어선 안 될 게 뭔지를 확실히 알고 왔어. 이후 난 그쪽에서 정해준 곳하고만 인터뷰를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 난 그분의 목숨을 구한 일반인이잖아? 아마 모르긴 해도 한동안 전국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었을걸? 근데 사람이 참 그렇다. 헛바람 드는 게 한순간이더라고. 내가 유명해진 게 내 능력 때문이 아닌데, 그걸 내가 대단한 거로 착각한 거야. 막 명품 사고, 외제차 타고, 일도 때려치우고, 아주 난리였지.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많던 돈은 다 어디 가고, 마이너스 통장, 듣보 코인, 중고 명품 몇 개만 남았더라고. 그제야 내가 얼마나 헛바람이 들었었는지 알겠더라. 후회했지 후회했어. 이제 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동생이 그러더라. 우리 집안에서 그래도 똑똑한 그놈이 하는 말이, 내가 그분께 돈을 받은 걸 세상에 고백하라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할 게 뭐겠냐고 말이야. 사람들은 그분이 나한테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를 가장 궁금해할 거라는 거야. 재계 서열 1위 재벌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 어떤 보상을 해줄 것인가? 전 국민이 그걸 궁금해할 거라고 말이지. 듣고 보니 동생 말이 맞아. 나라도 궁금할 것 같아. 그리고 동생이 하는 말이, 내 상황을 듣기만 해도 흥분이 되더래. 만약 내가 그분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는 거야. 모두가 부러워할 내용이니까, 차라리 그걸 인터뷰 같은 곳에 풀지 말고 강연을 다니래. 자기가 알아봐 줄 수 있다고. 난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한번 동생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지. 난 그분의 목숨을 구하고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어. 그런데 와 세상에, 나를 불러주는 곳이 엄청나게 많더라고? 내가 강연장에 가서 하는 거라고는 지금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것뿐인데도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어. 특히 강연 중간에 이런 부분이 있거든?

“만약 여러분이 ‘그분’의 생명의 은인이 됐습니다. 저는 바보처럼 그냥 돈을 요구했는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러면 사람들 얼굴에 행복이 보여. 하이고 참나, 행복이란 게 멀지 않더라니까? 정말 다들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몰라. 특히 청소년들이 정말 좋아하거든? 기억나는 대답 몇 가지만 말해볼까? 회장님 빽으로 대기업 입사해서 승승장구하고 싶다는 대답도 많고, 일단은 아무런 요구도 없이 순수하게 지인이 되겠다는 대답도 있고, 사윗감이 되고 싶다는 웃긴 녀석도 있고. 하여간에 재밌어. 나도 날 몰랐는데, 난 이런 일이 적성에 맞더라고. 내 말에 사람들이 호응해주는 게 너무 좋아. 전에 괜히 헛바람이 들었던 게 아니었던 거지. 강연을 다니면 다닐수록 점점 얘기를 과장하고 지어내게 됐어. 사람들이 어떤 포인트에 기뻐하는지 알다 보니까,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거야. 요즘 내 강연을 들으면, ‘그분’은 완전 갓이야 갓. 한국 사람들이 재벌 싫어하고 욕한다고? 절대 아니야. 사람들 재벌 찬양 썰 듣는 걸 훨∼씬 더 좋아해. 반응이 진짜 환상적이라니까? 문화센터 강연이든, 도서관이든, 대학교든, 고등학교든, 중학교든 다. 강연 담당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모객이 정말 잘된대. 그냥 무조건 1순위래. 그냥 내 이야기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가 봐. 아니면 내 얘기로 대리만족 같은 걸 하는 걸까?

사실 뭐, 가장 강력한 요인은 호기심이겠지. 생생한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고, 또 그분이 얼마를 줬는지도 궁금하고. 사실 그 액수가 결국 내 강연의 하이라이트잖아. 강연 마지막 질의응답 때 그 질문이 나오면, 일단 난 사람들에게 역으로 물어봐. 얼마를 받았을 것 같냐고. 그러면 정말 온갖 금액이 다 나오는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액수가 많더라고. 사실상 자기가 받고 싶은 돈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해. 그렇게 자, 적당히 뜸을 들였으면 이제 내가 대답해줘야 할 시간이지? 그거만 들으려고 온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러면 난 이제 동생이 시키는 대로 해. 일단 계산기를 꺼내고, 강연 담당자를 불러서 물어.

“오늘 제 강연료가 얼마죠? 귓속말로 말해주세요.”

담당자분이 내게 귓속말하면, 난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 말해.

“제가 그분께 받기로 했었던 금액은 대략 오늘 강연료의 ‘xxx배’입니다.”

사람들이 난리가 나면 난 퇴장하는 거지. 보면 강연장마다 몇 배인지가 달라지는 게 재밌을 거야. 사실 아직 내 입으로 정확한 액수를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그래도 대충 입소문이 돌긴 하더라고. 과연 그게 맞을까? 진짜 액수가 얼만지 궁금하지 않아? 글쎄, 앞으로도 강연을 계속 다녀야 하니까 정확히 말해줄 순 없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 그분께 받은 돈보다 지난 1년간 강연 다니면서 번 돈이 더 많다는 거. 놀랍지? 참 우리나라는 사랑스러운 나라야. 재벌 목숨을 구해준 썰만 풀어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나라라니 말이야. 덕분에 내 인생도 정해졌잖아? 이렇게 작가로의 삶을 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돈 많은 것이 명예가 된 세상 학교강연서 실감”

■ 작가의 말

“지금은 돈이 많은 것이 곧 명예가 되는 느낌입니다. 가장 대단한 사람은 어떤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돈이 많은 사람인 거죠.” 김동식 작가가 돈이 곧 명예라고 느낀 계기는 한 학교에서의 강연 때문이다. 강연자로 나선 그는 “학생들이 가장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차은우 같은 연예인인 줄 알았는데 재벌 그룹의 회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소설 ‘그분의 목숨을 구하다’를 쓰게 됐다.

소설은 A그룹의 회장을 구해 ‘생명의 은인’이 된 한 작가가 그때의 이야기로 강연을 다니는 이야기다. 김 작가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왕자의 간택이라면, 재벌의 간택이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인 것 같다”며 재벌과의 사연이 돈이 된 소설 속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재벌 그룹의 회장 이야기로 먹고사는 작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주인공 ‘나’는 아마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점점 무리한 거짓을 섞어가다가 끝내는 잊히겠죠.”

■ 김동식 작가는

1985년생. 2016년 온라인에 창작 소설 게재 후 소설집 ‘회색 인간’으로 작가 데뷔. 소설집 ‘성공한 인생’ 등 출간.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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