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 상상하지 못했을 뿐”

손고운 기자 2024. 4. 2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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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세계 최초 파타고니아스쿨 만든 한국 회사원들… 기후위기에 맞설 ‘새 자본주의 씨앗’ 꿈꾸다
파타고니아스쿨을 만든 이들이 파타고니아의 시작이었던 ‘쉬나드 이큅먼트’ 대장간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대장간의 작은 시작이 파타고니아를 만든 것처럼 파타고니아스쿨이란 작은 출발이 ‘새 자본주의’의를 만드는 씨앗이 되길 바라고 있다. (왼쪽부터)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 김광현 파타고니아 환경팀장, 서진석 이노소셜랩 연구위원, 유승권 이노소셜랩 이사. 김진수 기자

2024년 4월6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주택가. 작은 텃밭을 끼고 있는 낮은 건물에 12명의 회사원이 모였다. 친환경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에서 일한다는 기미경씨가 입을 뗐다. “아프리카, 필리핀 등에서 국제개발협력 일을 한 지 10년쯤 됐을 때 이런 질문이 떠오르더라고요. 우리가 ‘지속 가능한’이라는 목표를 두고 공적개발원조(ODA)에 자금과 열정을 쏟고 있는데, 정말 이 방식이 지속 가능한 게 맞나? 우리는 지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게 아닐까?”

박지원씨도 말을 보탰다. “저는 비정부기구(NGO) 연구원 등을 거쳐 삼성전자 반도체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국가 기후 정책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온 ‘빅웨이브’라는 국내 최대 청년 기후변화 위기대응 단체를 운영하고 있고요. 비영리의 심장을 가지고 영리기업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이에서 고민이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엄청나게 큰 기업이 진정성 있는 ESG를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까.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실무자는 어느 선부터 고민해야 현명하게 일할 수 있을까.”

파타고니아스쿨 1기 학생이 된 회사원들이 2024년 4월6일 서울 강남구 파타고니아코리아 사옥에 모였다. 김진수 기자

1기 지원자 62명, 최종 8명 선발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6차 보고서는 2023년 ‘향후 10년 동안 시행되는 선택과 행동이 수천년간 지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후붕괴에 따른 생태계 붕괴가 눈앞에 있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기업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본 생태계에서 살아남기에만 급급하다. 기후붕괴에 대응한다는 기업도 ESG를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인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각 정도에 머무른다. 그러니 기업에 속한 회사원들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기후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업이 사회를 바꿀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며 뭉친 회사원들이 있다. 이들이 이날 모인 곳은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코리아 사옥이다. 그리고 이날 세계 최초의 ‘파타고니아 언패셔너블 비즈니스 스쿨’(파타고니아스쿨)이 한국에서 문을 열었다.

파타고니아스쿨은 환경운동가 이본 쉬나드(슈나드) 회장이 창업한 파타고니아의 경영·환경 철학에 대해 배우고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에 이 철학을 확산하고픈 이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본사의 문을 두드려 만든 학교다.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 김광현 파타고니아코리아 환경팀장, 서진석 이노소셜랩 연구위원, 유승권 이노소셜랩 이사, 김정태 미스크(MYSC) 대표이사 등이 설립에 참여했다. 단순히 이름만 빌린 게 아니라 파타고니아 본사의 인증을 받은 학교다. 빈센트 스탠리 파타고니아 철학담당 이사가 직접 교장을 맡았고, 교육 커리큘럼을 짜는 데도 참여했다. 2024년 3월 진행된 파타고니아스쿨 1기 교육생 모집에는 현직 기업의 지속가능 경영이나 시에스아르(CSR, 기업의 사회적 책임), ESG 담당자 62명이나 지원했다. 이들은 자기소개서와 함께 이본 쉬나드의 저서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독후감을 제출해 1차 서류 심사를 받았고, 2차 인터뷰를 거쳐 8명이 선발됐다.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쉬나드 회장이 2022년 9월 자신과 가족의 지분을 100% 환경 보호 비영리재단에 양도하는 발표를 하며 공개한 사진. “지구는 이제 우리의 유일한 주주”라고 적혀 있다. 파타고니아코리아 제공

파타고니아스쿨의 시작은 8년 전인 2016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넥스트 CSR 파타고니아>를 쓴 유승권 이사와 <행동주의기업>을 쓴 서진석 연구위원 등이 미국 출장길에 캘리포니아주 벤투라에 있는 파타고니아 본사를 방문했다가 기업의 철학에 대한 생각을 전환할 계기를 맞게 됐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본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점과 파타고니아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파타고니아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아주 적고 굉장히 긴급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업이 (이미지 제고나 규제 회피를 위해) 어떻게 ESG 평가에 잘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어떻게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기 때문에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거죠. 그래서 ‘우리도 ESG에 대해 더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현재의 기업 ESG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단순히 파타고니아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파타고니아와 바라보는 방향을 같게 하는 활동가들을 기르는 게 목표인 거죠.” 서진석 연구위원의 말이다.

“모든 결정은 환경 위기를 염두에 두고 내린다”

이 말처럼 파타고니아는 ESG를 통해 장기적인 이익 창출이라는 경영 이론 그 이상의 환경 철학을 말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이사회에 제출된 ‘우리의 가치관’이라는 글을 보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위태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는 전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의 모든 결정은 환경 위기를 염두에 두고 내린다”고 적혀 있다.

이런 가치관에 감명을 받은 파타고니아스쿨 설립자들은 2018년 6월 일주일 동안 파타고니아 본사를 다시 찾아 본사의 운영 현황까지 샅샅이 취재했다. 그러면서 파타고니아가 조직 구성원의 행복도를 높이는 것이 파타고니아 경영 철학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여긴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 기본 조건의 한 사례가 사내 어린이집이었다. 파타고니아는 미국 전역의 사내 어린이집이 120개(지금은 8천여 개)에 불과하던 1980년대부터 사내 어린이집을 설치했다. 단순 설치만이 아니라 가족 친화적 직장에 필요한 법규와 기준을 만들고 로비를 통해 정책이 연방 법률로 제정되도록 압박했다.

파타고니아는 1957년 등반가이자 서퍼였던 이본 쉬나드가 창업했다. 시작은 작은 암벽 등반 장비 제조업체였다. 암벽을 손상하는 장비 ‘피톤’을 대신해 바위에 피해를 주지 않는 초크를 만들어 암벽 등반 문화를 바꿨다. 1970년대에는 의류 회사를 만들어 튼튼한 하나의 옷을 만든 뒤 평생 수선을 책임지는 ‘원웨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농업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환경 피해를 줄인 기능성 원단을 개발하고, 유기농 목화로 면제품을 제작했다. 유기농 목화와 책임 있는 생산·가공을 거친 양모를 사용한 뒤에도 독성염료로 인한 물 오염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독성이 적은 염료 사용을 고집했다.

서울 강남구 파타고니아코리아에서 열린 파타고니아스쿨 개강식 현장. 김진수 기자

국내 기업은 ‘ESG 공시 의무화’ 방어에 급급

특히 ‘환경보호 자금을 대기 위해 기업을 한다’는 철학에 걸맞게 매출의 1%나 수익의 10% 중 더 많은 쪽을 지속적으로 환경보호 활동 및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아울러 국외 지사의 환경팀들이 각 나라의 환경 문제를 자체 발굴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사실상의 환경운동 활동을 한다. 무엇보다도 파타고니아의 이름을 널리 확산한 계기는 2022년 이본 쉬나드가 “파타고니아의 유일한 주주는 지구”라며 가족 소유의 회사 지분 100%(약 4조2천억원 상당)를 환경보호 목적의 비영리재단에 양도해 지속적으로 배당금이 환경단체 등에 흘러들어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일이었다.

이본 쉬나드는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파타고니아는 하나의 실험”이라고 말했다. ‘환경 붕괴가 목전에 있다’는 전세계 과학자들의 보편적인 합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행동을 취할 의지가 부족한 것은 “무관심, 타성, 상상력의 부재로 인한 집단적 마비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지적처럼 국내 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은 환경 철학보다는 ‘ESG 관련 평가에 방어’하는 문화에 가깝다. 글로벌 ESG 공시 의무화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도 의무화에 나섰지만, 선제적이거나 적극적이진 않다. 금융위원회는 2024년 4월22일 ‘ESG 금융추진단 4차 회의’를 열고, 국내 상장기업들이 2026년 이후 기후 분야부터 ESG 공시가 의무화한다는 점을 밝혔다. ‘기후 관련 위험 요인에 대응하는 기업의 노력’ 등을 평가할 수 있게 온실가스 배출량 등 지표를 공개하라는 것인데, 이제까진 온실가스 배출량, 중장기 감축계획 같은 법적 공시 의무가 없었던 비재무 정보에 대해서도 법적 공시 의무가 생긴 것으로 보면 된다. 파타고니아에 견주면 상대적으로 ‘미적지근한’ 이런 규제에도 한국 기업들은 시큰둥한 분위기다. 적극적인 기업이라 해도 규제에 대응하는 정도의 인식에 그친다.

“파타고니아는 사실 ESG 공시 기준이나 평가를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ESG 평가 기준은 투자 부문이 기업의 가치를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기업철학과 방향에 의거해 실천해나가는 파타고니아와는 관점부터 다르죠. 우리나라는 2026년부터 의무화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량까지 포함하는) ‘스코프3’ 공시 포함에 대해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할 건 법정 고시가 아니라 거래소 공시인데, 거래소 공시로 가면 처벌이 좀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서진석 이노소셜랩 연구위원)

다만 파타고니아스쿨을 만드는 데 참여한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은 우리 곁에도 파타고니아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기업이 있다고 말했다. “파타고니아는 영리기업이에요. 영리기업인데 주주는 지구로 돼 있는 거죠. ‘지속가능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게 거버넌스다’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요. 결국 모든 게 의사 결정 시스템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인 ‘이사회’가 누구냐면, 주주들이 선임해 만든 구성 협의체잖아요. 결국 중요한 건 주주예요. 그럼 파타고니아의 주주는 지구니까, 파타고니아의 제일 중요한 거버넌스는 ‘지구’가 되는 거죠. 파타고니아가 하는 일과 유사한 형태로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대표적인 게 사회적경제 조직들입니다.”

2018년 6월 서진석 위원 등이 미국 파타고니아 본사를 방문했을 당시 사진. 서진석 제공

파타고니아의 주주는 지구

파타고니아스쿨은 4월6일 입학식, 5월 열리는 빈센트 스탠리 교장의 온라인 특강을 시작으로 9월14일까지 격주로 모두 13번의 특강과 독서 발제와 토론, 주제 토론 등의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특강 주제는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이해, 재생&순환 비즈니스 이해와 적용, 행동주의 비즈니스, 그린워싱의 유혹과 함정 등이다. 교재 도서 구입비는 모두 자부담이다. 아울러 10월에는 파타고니아 본사를 8일 동안 방문하는 일정도 준비돼 있다. 직접 본사를 살펴보고 ‘어떻게 환경운동가의 기업이 가능했는지’를 묻고 관찰하도록 일정을 짰다. 현지 숙박과 식사를 제외하고 왕복 항공료와 미국 여행 서류 발급비 등도 모두 자부담이다. 이런 공부와 토론, 관찰, 취재 등을 통해 파타고니아 철학을 파악한 회사원들이 새로운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씨앗’이 되길 꿈꾸는 게 파타고니아스쿨의 설립 취지다.

“파타고니아스쿨을 시작한다고 하니 경력이 굉장히 화려하고 뛰어난 분이 많이 지원했어요. 하지만 뽑지 않았어요. 저희는 ‘파타고니아 언패셔너블 비즈니스 스쿨’이라는 네 단어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분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뽑은 분 중에 이케아·삼성전자·에스케이(SK)텔레콤 같은 거대 기업에서 일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들이 사내 혁신가가 돼 움직이면 그 안에서 바이러스가 돼 문화를 번지게 할 수 있어요.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요.” 유승권 이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좀더 작은 조직에서 변화 가능성을 꿈꾸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뽑힌 분 중에 전남 곡성의 친환경 농업회사에서 일하는 분, 파타고니아에 실제로 옷을 납품하는 의류회사에서 일하는 분도 있습니다. 파타고니아 설립자와 철학 이사가 쓴 책에서 얘기한 게 진짜 잘 실현되고 있나? 아니면 알려진 것보다 더 철저하게 하고 있나? 진실과 거짓의 관점에서 책보다 더 나아간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1기 학생들도 희망을 얘기했다. “제가 파타고니아 관련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봤던 게 주차장이에요. 직급이랑 전혀 상관없이 가장 효율이 좋은 차를 좋은 자리에 배정할 수 있게 했다고 하는데, 이게 가능한가 싶어서 그 부분을 몇 번이나 읽었어요. 한국 회사들은 임원 위주로 돌아가고, 말단 직원들은 그런 권한이 없잖아요. 이렇게 작은 것부터 정말 환경·자연을 생각하면서 실행할 수 있다는 건 창업주와 임원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성원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문화가 나온 것인가 너무 파타고니아가 궁금해요.” 의류기업에서 일하는 이주연씨가 말했다.

파타고니아 창립자 이본 쉬나드의 젊은 시절. 파타고니아 제공

‘환경 우선’ 경영·조직문화 실현 방안 궁금해

“저는 이케아에 들어가고 굉장히 만족했던 부분이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비전이었어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면서 재단이 운영하는 국외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거든요. 유니세프 등 기금을 지원한 현장에 가서 우리가 낸 돈이 세상을 좋게 만드는지를 보고 직원들한테 얘기해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영리기업임에도 이런 비전으로 직원들에게 영감을 주는데 그것이 저한테 꽂혔던 거 같아요. 사실 지금 제가 근무하는 이케아 근무처는 지속가능성 담당자가 딱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방향성 자체가 ‘모든 사람이 지속가능성 매니저가 돼라’는 거거든요. 파타고니아스쿨에서 ESG를 넘어선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기여하고 싶습니다.” 이케아코리아에서 일하는 오꽃별씨의 말이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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