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탓 삶 힘들어져” 김민기, 조용필에 답가도 NO 노래 끊은 이유(학전)[어제TV]

서유나 2024. 4. 29.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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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뉴스엔 서유나 기자]

천재 작곡가로 통했던 김민기가 노래를 끊고 '뒷것'을 자처하게 된 이유가 공개됐다.

4월 28일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2부에서는 33년 만에 폐관한 대학로의 상징 소극장 학전을 설립한 대표이자 '아침 이슬' 작곡가 김민기의 음악 인생을 들여다봤다.

이날 음악평론가 강헌은 김민기가 가왕 조용필과 만난 자리에서도 노래를 한 곡도 안 했던 일화를 전했다. 조용필이 먼저 '아침 이슬'을 선곡해 불렀는데도 조용히 듣기만 하고 절대 답가를 하지 않았다고.

김민기의 노래를 들은 적 없는 건 윤도현, 박학기, 장필순, 강산에, 전인권 등 후배 및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민기의 55년 지기인 판소리 명창 임진택은 "자기는 노래를 끊었다고, 안 부른다고 하더라"고 말했고 음악감독 정재일은 "술 먹다가 들은 얘기로는 당신의 삶이 음악 때문에 힘들어진 것도 있고 음악이 싫어진 것도 있는데, 음악을 싫어하게 될 수는 없잖나. 여러 가지 그런 감정이 있으셨던 것 같다"고 조심스레 이유를 짐작했다.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학전에 남아있는 김민기의 친필 노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 김민기의 지난 음악 삶을 짐작하게 했다.

때는 통기타 열풍이 불던 1971년 10월, 서울대 동기 김영세와 듀엣 '도비두'로 활동하던 김민기는 자작곡 '친구', '아침이슬', '길', '아하 누가 그렇게' 등이 수록된 1집 앨범을 발매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곡 자작곡 앨범. 김민기의 앨범은 유치한 번안 가사들의 노래가 넘쳐나던 시기 남다른 음악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1972년 유신이 선포되며 김민기의 음악 활동을 어려워졌다. 김민기의 대학 후배는 "그때 모든 사람이 거의 유신에 반대했다. 매일 데모만 했다. 그때 데모하면서 부른 노래가 '아침 이슬'이랑 '친구'다. 김민기를 모른 사람이 전국 대학생 중 없었을 거다"라고 회상했다.

연출가 이상우에 의하면 이에 김민기도 여러 번 중앙정보부에 잡혀 갔다고. 실제 김민기는 "눈에 수건 가리고 시내를 한참 돌아다녀 어떤 기관인지 알 수 없었다. 연행된 이유는 그 당시에 각 대학에 노래 서클들이 막 생겨날 때였다. 저는 전혀 관계 없었는데 제가 배후에서 주도를 했다는 혐의더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임진택은 "김민기가 불온한 가수로 찍힌 계기다. 민기는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한 적이 없다. 순수하게 노래를 만든 건데 당시 정치 상황에서 민기 노래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줬다. 많은 사람들이 민기의 '아침이슬'을 듣고 '애국가'처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투사가 됐다. 투사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용기를 엄청 얻었다. 김민기의 숙명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아침 이슬'이 금지되며 김민기의 모든 곡이, 급기야는 김민기의 활동 자체가 금지가 됐다. 김민기의 첫 번째 앨범은 전량 회수, 판매 금지가 됐다. 송창식은 "다 집어치우고 음악만 했으면 엄청났을 거다. 음악으로 나갔으면 한국 대중음악을 뒤엎어 놓았을 텐데 아깝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요한 건 김민기의 이후 활동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돈을 벌어야 했지만 사회생활이 막힌 김민기는 당시 3D 업종으로 통했던 피혁공장에서 사무직 일을 시작했다. 해당 피혁공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했다는 곽기종 씨는 "김민기 씨가 점심시간이 되면 기타를 쳐주는 모습을 몇 번 봤다. '가을 편지'를 불렀던 것 같다. 옆 공장에서도 몰래 들어와 구경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이어 "항상 격려를 많이 해줬다. 우리가 배우지 못했는데 직접 나서서 회사 안에 모아놓고 새벽에 공부를 가르쳐 줬다"며 김민기가 야학을 운영했음을 전했다. 곽기종 씨는 김민기의 '상록수'가 사실은 노동자 부부들의 합동 결혼식 축가로 김민기가 직접 작곡한 거라는 비하인드도 공개했다.

김민기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장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 김민기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다. 야당 총재까지 구속하고 구금하던 시기였기에 이는 한국 최초 비합법 언더그라운드 앨범으로 만들어졌다. 100% 심의를 통과할 수 없음을 알기에 김민기가 이를 지하에서 제작했다는 것.

당시 김민기는 서울대학교 노래서클 '메아리'에 소속된 후배들에게 가창을 맡기며 잡혀갈까봐 걱정하는 후배들에게 "책임은 내가 진다"고 확언했다. 의문사까지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이때 송창식 또한 목숨을 걸고 녹음실을 빌려주며 힘을 보탰다.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공장의 불빛'은 여성노동자들 사이 퍼져 나갔다. 과거 YH무역 공장 노동자였던 최순영 씨는 "김민기 씨가 우리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작사 작곡을 해 주니 너무 고마웠다. 이런 좋은 사람도 있네.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며 "우리 투쟁(YH무역 농성 사건) 촉발에 불을 붙였다"고 밝혔다. 심지어 김민기가 노동자로 일하며 야학운동을 하던 고 박기순의 영결식에 나타나 반주도 없이 '상록수'를 장송곡으로 불러주고 갔다는 일화도 공개됐다. '이들의(노동자들의) 통곡 저 뒤에도 김민기가 있었다'는 자막이 뭉클함을 자아냈다.

뉴스엔 서유나 stranger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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