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바다 된 LA, 한국인들은 총을 들었다…흑인의 분노, 왜 한인 향했나[뉴스속오늘]

김소연 기자 2024. 4. 2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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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LA 폭동 당시 불타는 가게/사진= 다큐멘터리 '불타는 LA' 화면 캡처

1992년 4월29일, 미국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잊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던 흑인들이 백인 대신 평소 불만을 품었던 한인들에게 쳐들어와 한인 사회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 한인 사회에는 지금까지도 그날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다.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따고, 국회의원도 배출하는 등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노력이 끊이지 않는다.
"저건 너무해!" 경찰의 과잉진압· 백인 편파적인 재판…흑인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32년 전인 1992년 4월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복판이 불바다로 변했다.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찰관 4명이 무죄 평결을 받자 인종차별이라고 판단해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력과 방화, 약탈, 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 폭동으로 55명이 사망했고 2300여명이 다쳤다. 피해액은 총 7억2000만달러(한화 9100억원)에 달했다.

발단은 음주운전을 했던 로드니 킹 사건이었다. 로드니 킹은 LA 210번 고속도로에서 마약과 음주 상태로 과속 주행을 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차에서 내리라는 경찰의 명령에 강하게 저항하는 로드니 킹을 위협적으로 본 경찰의 구타가 시작됐다. 당시 로드니 킹이 강도, 폭행, 절도 전과로 가석방된 상태에서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고, 극렬한 저항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LA 폭동 당시 불타는 건물들/사진=유튜브 갈무리

그러나 로드니킹을 구타하는 경찰의 영상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고 경찰 과잉진압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법원이 배심원단을 전원 백인으로 채우고, 이 재판에서 경찰관 4명 중 3명이 무죄판결을 받자 흑인들이 분노해 시위가 시작됐다. 처음은 시위였지만 이내 폭동으로 바뀌었다.

분노 대상은 처음에는 백인이었다. 그러나 이내 한인타운이 됐다. 경찰이 백인 동네 진입을 막자, 평소 같은 이민계면서 부유해보였던 한인 상인들이 분노 표출 대상이 된 것이다. 경찰이 백인 거주지 진입은 막고, 한인 지역 길목은 열어놓은 것이 발단이 됐다.
백인에게 맞은 뺨, 한인에게 화풀이
자경단 모습/사진=유튜브 갈무리
폭력에 직접 노출된 한인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금액적인 피해는 약 4억달러, 점포는 2300여곳이 손상을 입었다. 이는 LA폭동 전체 피해액(7억달러)의 절반 이상이다.

다만 이 와중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한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 자율적으로 꾸린 '자경단' 활동 덕분이다. 한국 남성들이 대부분 군필자인 덕분에 총기 사용에 능했다는 것이 이점이 됐다.

한인 가게 주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총기와 탄약을 들고 가게 지붕 위로 올라가 폭도들과 공성전을 벌였다. 이에 흑인 폭도들은 자경단을 만나자 달아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평소 폭력 성향은 강했지만 군사 훈련은 되지 않아 조직적으로 대응에 나선 한국 예비군들을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경단 이미지/사진=유튜브 갈무리
역사 유튜버 '썬킴'이 자신이 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증언에 의하면 "영관급 예비역도 있었고 소령이었던 분들도 있었다"며 "일사분란하게 업무를 분담하고 몸이 M16, M1 조립과 해체를 기억해 원샷, 원킬로 경고사격을 했고 특히 해병대 출신들의 활약이 컸다"고 회상했다.
"우리 그냥 잘 지내면 안돼?"…달라진 한인·흑인 사회
화해하자고 말하는 로드니 킹/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사태는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던 로드니 킹이 직접 나서 "그냥 우리 같이 잘 지내면 안돼?"라고 발언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폭동을 계기로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2000년 흑인사회 지도자인 애그니스 페이 콜맨 목사가 나서 "한인 형제들이여, 허락해준다면 LA폭동으로 상처입은 한인 커뮤니티에 사과하고 싶습니다"며 공식 사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LA시 당국에서도 시 차원에서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협력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때 코리아타운 중앙에 미국 자금으로 설립된 공립학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이후 한인끼리만 뭉쳐살던 한인 커뮤니티도 외부와의 소통 강화에 나서게 됐다. 영주권 뿐만 아니라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는 한편, 타 커뮤니티와도 대화에 나선 것이다.

(왼쪽부터) 매릴린 스트리클런드(민주당·워싱턴주·초선), 영 김(공화당·캘리포니아주·초선), 미셸 박 스틸(공화당·캘리포니아주·초선), 앤디 김(민주당·뉴저지주·재선) 의원.

2020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서 앤디 김(민주·뉴저지), 매릴린 스트리클런드(민주·워싱턴), 미셸 박 스틸(공화·캘리포니아), 영 김(공화·캘리포니아) 등 한국계 의원 4명이 동시에 탄생했고, 이들은 2022년 모두 연임에 성공했다.

올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연방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한인 후보는 총 9명으로, 역대 최다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소연 기자 nicks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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