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늘 있다[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얼마 전 옛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두 해 전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시점에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연락이 끊긴 사람이었다.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동료는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 꽤 좋은 조건으로 재취업 제의를 받았는데 어찌할지 모르겠다며 내 생각을 물었다. 흔치 않은 기회 앞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동료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속칭 일찍 잘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최소 2년은 함께하기로 했지만 모를 일이라며 요즘 같은 시대에 계약 기간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도 덧붙였다. 혹여 갑자기 정리하라는 말을 들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일자리마저 잃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었다. 동료는 작은 제조업체에서 부품 조립을 하고 있었는데 그조차도 어렵게 구한 곳인 듯했다. 자기가 나오는 순간 또 다른 직원으로 곧바로 채워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막상 계획이 잘못되었을 때 돌아올 자리도 없다면 결국 둘 다 잃는 꼴이 될 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모든 생각이 실패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새 일에 대한 확신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어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동료의 지난날을 기억하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회사와 결별한 지 2년 만에 동료의 두 날개가 꺾인 듯하여 안타까웠다. 동시에 흘러간 기억이 떠올랐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내가 퇴직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본인의 후배가 사업체를 차리는데 내부 살림을 맡아주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로서는 기분 좋은 조건이었음에도 흔쾌히 수락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나를 믿지 못했던 탓이었다. 겉으로는 아직 건재하다고 큰소리쳤어도 내 안은 패배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서 혹독한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한없이 작아진 상태였다.
끝내 나는 제안을 거절했고 친구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 시작했다. 일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건만 확실히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실패가 두려워 지레 포기했다는 후회까지 더해져 스스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세상을 향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는데 정작 주어진 상황과 마주하여 겁부터 먹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다. 그 후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어쩌면 퇴직이 사람을 그처럼 만드는 것 같다. 넘치는 열정을 잠재우고 불굴의 도전정신을 사그라지게 했다. 특히 원치 않게 회사와 이별한 사람은 더 그럴지도 모른다. 회사를 떠나달라는 통보를 받는 순간 좌절감에 한 번, 이후 모두가 가버린 듯한 상실감에 또 한 번, 그 과정을 거치면서 심히 위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 소개로 뵈었던 인생 선배님께 그 답을 찾았다. 그분 역시 한때 직장인이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연세가 많았다. 놀라운 점은 그분의 태도였다. 작은 농담에도 환하게 껄껄껄 웃으시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칙칙한 표정에 웃음기 없는 나와는 사뭇 달랐다. 자신감을 넘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비법이 궁금해졌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빠요.” 그분이 짧게 대답하셨다. 소셜미디어에 영상도 올리고 동년배분들께 스마트폰 사용법도 가르치는 등 일이 정말 다양했다. 예전에 못 해본 일을 하는 것도 재밌고, 당신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있어 신난다고 하셨다. 그분은 스스로 절대 깎아내리지 않으셨다. 세상의 척도와는 다른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생각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았다.
퇴직했다고 해서 내 값어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된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다. 이미 떠난 직장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이 사회에는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걸 모든 퇴직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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