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성열]‘구하라 엄마’의 상속… 이제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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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에게는 '엄마'라는 존재가 없었다기보단, '엄마'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부를 수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인 씨는 가수 구하라 씨의 오빠였고, 이날은 이른바 '구하라법'의 20대 국회 본회의 상정이 무산되면서 폐기가 확정된 날이었다.
21대 국회에서 재발의된 구하라법 역시 헌재의 결정으로 헌법적 근거를 갖출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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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2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 평범해 보이는 30대 남성 구호인 씨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호인 씨는 가수 구하라 씨의 오빠였고, 이날은 이른바 ‘구하라법’의 20대 국회 본회의 상정이 무산되면서 폐기가 확정된 날이었다.
호인 씨는 “구하라법이 만들어지더라도 우리에겐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입법청원을 추진한 이유는 ‘구하라’라는 이름처럼 슬픈 삶을 살아왔던 분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동생의 이름이 우리 사회를 보다 보편적 정의와 인륜에 부합하는 곳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며 “21대 국회에선 반드시 통과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낯선 기자들 앞에 호인 씨가 선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남매가 어릴 때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생활비를 벌었고, 할머니와 고모가 남매를 돌봤다. 어릴 때부터 모델로 선발되고 오디션에서 두각을 보였던 하라 씨는 열일곱 살 때 그룹 카라로 데뷔해 ‘1세대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됐다.
호인 씨가 결혼하고 부인이 임신하자 하라 씨는 조카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하라 씨는 끝내 조카를 만나지 못한 채 2019년 11월 24일 2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호인 씨가 국회를 누비는 ‘투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다. 하라 씨의 장례식장에 20여 년 만에 친모가 나타났던 것이다.
친모는 가족들의 저지에도 상주 역할을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발인 후 친모 측 변호사는 ‘유류분’을 주장하며 하라 씨가 남긴 부동산 매각 대금의 일부를 달라고 요구했다. 유류분이란 고인이 유언으로 재산을 남기지 않았어도 자녀 등에게 보장되는 최소한의 상속분이다. 민법상 친모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을 받을 수 있었다.
급히 이곳저곳 물어보니 친모가 달라면 줘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민법이 그렇다는 이유였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호인 씨는 이 사실을 알리고 나섰고, 전 국민적인 공분이 일었다. 호인 씨가 국회에 올린 입법청원에 10만 명이 동참하자 국회의원들이 나서 ‘구하라법’을 발의했다. 부모·자녀를 부양·양육하지 않거나 학대한 이른바 ‘패륜 가족’은 상속권을 박탈하는 내용이었다. 정부도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구하라법은 20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모든 법률의 근간이 되는 민법을 개정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행위를 ‘패륜’과 ‘부양’으로 정의하고 어디까지 범주로 설정할 것인지 논란이 이어졌다. 상속권 박탈 기준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사법부가 먼저 응답했다. 헌법재판소는 25일 ‘패륜 가족’은 유류분을 받을 수 없게끔 내년까지 민법을 개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유류분 제도가 47년 만에 처음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재발의된 구하라법 역시 헌재의 결정으로 헌법적 근거를 갖출 수 있게 됐다. 법조계에선 패륜·부양의 정의와 범주에 대한 이견도 좁혀지고 있다. 이제 국회가 나서 ‘구하라 가족’의 눈물을 닦아줄 차례다.
유성열 사회부 차장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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