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봄날, 나비 이야기
봄이라고 마냥 활기찬 것은 아니다. 식후 찾아오는 잠기운이 상춘의 의욕을 꺾는다. 바야흐로 춘곤증의 계절이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녀 진정 나비인 줄로 알았건만 깨고 나니 사람이더라며 나비가 된 사람의 꿈인지, 사람이 된 나비의 꿈인지 알 수 없었다는 장자(莊子)의 유명한 이야기도 기실 춘곤증과 사투를 벌이다 얻은 깨달음이 아닌지 모르겠다. 봄날 나비를 바라보다 무심코 잠이 든 건 아니었을까.
요즘 창밖으로 나비가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한다. 전야제 불꽃놀이 같은 벚꽃이 떨어지고 이제 만화방창(萬化方暢), 본격적인 성장의 계절에 찾아온 손님이다. 신라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그 꽃이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꽃과 나비는 서로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당나라의 시인 정곡(鄭穀, 849~911년)은 '조린 낭중이 계신 자리에서 나비를 읊다'라는 시에서 나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름다움을 찾아 또 향기를 찾아 한가한 듯 바쁜 듯 아지랑이 피면 풀 속에 숨고 가랑비 내리면 꽃송이에 잠든다."
중국어에서 나비를 뜻하는 한자 '접'(蝶)은 여든 살 노인을 뜻하는 한자 '질'(그림1 한자 참조 )과 발음이 같다. 평균수명이 오늘보다 짧았던 과거에 80세는 장수를 의미했다. 그래서 나비는 무병장수를 축원하는 동아시아 공통의 상징이 됐다. 전통시대 여러 물건에 들어간 나비 무늬에는 이런 의미가 담겼다. 사람들은 그 뜻을 담아 나비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어떤 그림은 고양이를 추가로 그려 넣기도 했는데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 '묘'(猫)도 일흔 살 노인을 뜻하는 '모'( 그림2 한자 참조)와 발음이 같았기 때문으로 70~80세까지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였다. 고양이를 나비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꽃과 나비만큼이나 나비와 고양이도 인연이 깊다.
나비 그림은 품격 있는 선물로 꽤 인기였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비 그림으로 손꼽히는 사람으로 남계우(南啓宇, 1811~1890년)가 있다. 숙종 때 유명한 재상 남구만(南九萬)의 5대손으로 정3품 벼슬인 도정(都正)까지 역임했다. 나비를 즐겨 그려 당시에는 '남나비'라고도 불렸다. 최남선(崔南善)은 남계우의 나비 병풍을 "형태와 채색이 각각 일묘(一妙)를 나타내 의장(意匠)이 궁(窮)할 바를 몰랐다"고 평가했다. 얼마 전 조선시대 그림을 전공하는 동료에게 듣자니 남계우는 나비를 잡아 유리병에 넣거나 표본으로 만들어 가까이에서 관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그의 작품도 관찰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림이라고 한다. 다른 화가들은 대개 그림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밑그림 책, 화보(畵譜)를 보고 그리는데 그가 그린 나비는 종류가 훨씬 다양하며 또 각각의 나비마다 특징적인 동작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2005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부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찾아가 본 일이 있다. 화가들이 각자의 책상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을 현미경으로 열심히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도 그림으로 기록하는 이유를 에둘러 물으니 한 분이 이렇게 답했다. "사람의 눈보다 정확한 건 없어요. 하나 놓치는 것도 없고 무엇이 중요한지도 알죠." 남계우의 나비 이야기를 듣다 이때 기억이 났다. 한편 몇 년 전 MIT 연구진은 아프리카 호랑나비의 날개가 LED와 같은 방식으로 색을 낸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고효율 LED 개발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결과가 개발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역시 관찰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봄날의 정취, 그리고 가정의 달의 의미를 더해 박물관 동료들은 꽃과 나비 그림으로 전시를 새롭게 꾸몄다. 만일 날갯짓하며 날았더라면 가루가 떨어졌을 듯 선인들의 섬세한 표현에 봄날 잠기운이 싹 가신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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