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는 왜 스마트폰을 뺏어갔나 [사이공모닝]

이미지 기자 2024. 4. 2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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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거리며 베트남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게 취미입니다. 우리에게 ‘사이공’으로 익숙한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소음을 들으며 맞는 아침을 좋아했습니다. ‘사이공 모닝’을 통해 제가 좋아하던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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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거주할 때의 일입니다. 집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가는데 택시 한 대가 지나갑니다. 10여분만 걸으면 집인데 갑자기 걷기가 귀찮아집니다. 한국에서처럼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습니다. 집 주소와 길 안내 정도의 베트남어는 할 수 있는 게 분명한데 이 택시 기사는 자꾸 “못 알아듣겠다”며 “지도를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간단한 의사소통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발음이 엉망이란 말인가’라고 좌절하며 스마트폰으로 주소를 찾아 건넸습니다.

앞으로 좀 가던 택시기사가 집 앞 공사장에 차를 세우더니 “못 찾겠으니 여기에서 내려”라고 합니다. 어차피 집 근처이지만 의아합니다. “내 휴대폰 줘”라고 하니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뱅글뱅글 돌립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를 때 율동처럼요. 이건 ‘없다’는 뜻이죠. 인제야 상황이 파악됐습니다. 당한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휴대폰은 돌려받았습니다. 택시기사에게 “공안(우리의 경찰)에게 가자, 공안에게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친절히 문까지 열어주며 내리라는 택시 기사에게 저항하느라 조수석 목 받침대를 끌어안고 버틴 시간이 20여분가량 되지만요. 휴대폰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조수석 앞 서랍에서 나왔습니다.

택시 회사의 이름을 단 흰색 차량이 베트남 현지 택시 업체 '비나선' 택시이다. 또 다른 택시 업체 '마일린'은 차량이 초록색이다. /호찌민=이미지 기자

베트남 택시 기사가 사기꾼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당시 저의 경험담을 들은 사람들은 “그랩 때문에 수입이 줄어든 택시 기사들의 범죄가 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랩의 차량 호출 서비스 때문에 저처럼 길에서 손 흔들어 택시 잡는 사람이 줄어들어 ‘부수입’을 노리는 택시 기사가 늘었다는 말이었죠.

그랩과의 경쟁에서 밀려 존폐의 위기를 겪고 있는 건 배민 같은 배달 업체뿐 만이 아닙니다. 그랩의 차량 호출 서비스를 이용해 오토바이나 택시를 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택시 회사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고 합니다. 최근 베트남 택시 업체와 관련된 뉴스를 보니, 당시 겪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랩 활약에 쪼그라든 택시 업체 이익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차량 호출 서비스가 ‘카카오 T’라면 베트남엔 ‘그랩’이 있습니다. 작년 11월 보내드렸던 뉴스레터 <’배달의 민족’이 ‘배달 천국’ 베트남에서 짐 싼 이유는?>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베트남은 ‘그랩’이 장악한 나라입니다. 그랩이 베트남 차량 호출 서비스 부문에서 60%대, 배달 시장에서는 45%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요. 한국 배달 1위 업체인 배달의민족도 베트남 배달 시장에서 적자를 지속하다가 결국 4년 만에 철수를 선언했습니다.

그랩의 무기는 강력한 결합력. 차량 호출 서비스뿐 아니라 음식 배달, 마트 배송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이 서비스 이용 금액을 모두 합쳐 쌓은 포인트로 리워드(보상)를 받을 수 있습니다. 수시로 뿌리는 할인쿠폰을 잘만 이용하면 혜택은 더욱 커집니다. 이런 결합성과 프로모션을 무기 삼은 그랩은 베트남 차량 호출 시장과 배달 시장에서 점유율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젝이나 비, 쇼피 같은 업체들이 이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요.

베트남 거리를 운행 중인 현지 택시 업체 '마일린'의 택시. /호찌민=이미지 기자

베트남 현지에서는 ‘비나선’과 ‘마일린’이 대표적인 택시 업체입니다. 그런데 비나선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반 토막보다 더 쪼그라들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영업이익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58.5%나 줄어든 220억동(10억8800만원)으로 최근 2년 새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2016년만 해도 1만7200명이었던 비나선 소속 택시 기사들은 2022년 말, 2013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8분의 1 수준이죠. 차량 호출 업체들처럼 택시를 호출할 수 있는 앱도 만들고, 2022년까지 6년간 직원들의 급여를 삭감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이미 수세에 몰린 상황입니다.

배달이나 마트 배송 같은 서비스를 내세운 그랩의 결합력에만 밀린 게 아닙니다. 그랩의 강점은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가격을 매긴다는 것. 비가 오거나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엔 가격이 비싸지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시간대에는 파격적으로 낮은 수준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처음 수락한 금액이 더 비싸지지도 않습니다. 택시 기사가 길을 헤매느라 이동 거리가 늘어나도, 손님이 지불할 금액이 늘어나진 않죠. 이런 체계를 알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는 시간대에도 기꺼이 그 가격을 지불하게 됩니다.

비나선 같은 택시 회사들은 우리나라처럼 기본요금에 거리 단위로 추가 금액이 덧붙는 식입니다. 한가한 시간대에는 훨씬 더 비싸단 생각이 들죠.

서비스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랩 같은 차량 호출 업체의 경우 차량을 이용할 때마다 서비스 만족도를 평가합니다. 한번은 만족도 평가에서 별점을 1개만 주고 “차량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고, 운전을 난폭하게 한다”는 평가를 적었더니 채 하루가 되기 전에 해당 업체에서 ‘서비스를 개선하겠다’는 메일이 오더라고요.

평가가 좋은 기사에게 콜을 더 잘 배정해주기 때문에 친절한 응대가 기본이 됩니다. 함께 택시를 탄 친구가 지갑을 흘려서 앱에 공개된 택시 기사의 번호로 전화했더니 “가져다주겠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해당 거리만큼의 요금에 추가 금액을 얹어 건네려 했더니 “이거 대신 그랩에 ‘이 기사가 좋은 일을 했다’는 메일을 하나 보내달라”고 요구하더군요. 기꺼이 칭찬 메일을 보내줬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나선 같은 택시 업체들은 숙련된 택시 기사들을 모집하고, 고급 차량도 추가로 구매한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 수준의 매출을 올리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요.

◇한국에서는 ‘불법’ 논란에 막혀

서울 거리를 오가는 타다 차량과 카카오T로 호출 가능한 일반 택시들. /뉴스1

베트남의 상황을 보면서 한국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량 호출 서비스인 ‘우버’는 불법 논란으로 한국 시장에서 한차례 철수했었습니다. 그랩과 비슷한 차량 호출 서비스인 ‘타다’도 불법 논란에 경영진이 기소됐다가 작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죠. 우버는 국내 업체인 SK스퀘어의 계열사 티맵모빌리티와 함께 ‘우티’라는 택시 서비스로 한국 시장에 재진출 했는데, 택시업계의 반발에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입니다.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해외에서 그랩이나 우버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 본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차량 호출 업체의 진출을 막았던 일본도 이달부터 자가용을 이용한 차량 호출 서비스를 허용하기로 했죠. 우리도 카카오T 같은 앱으로 택시 호출이 가능하지만, 요금 탄력제 등은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작년 서울의 택시 기본요금이 3800원에서 4800원으로 오르고, 할증률도 최대 40% 인상됐지요.

택시 시장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기존 택시 업체들의 고충도 이해는 가지만,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IT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빌리티 혁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서비스나 요금 측면에서 우리 소비자의 눈높이 역시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할 부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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