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예산 ‘예타’ 없앤다... 1조 양자과학 사업 족쇄 풀려

유지한 기자 2024. 4. 2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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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백형선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 집행 때 경제성을 평가하는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를 폐지하고, 부처 간 중복·유사 R&D를 방지하기 위해 범부처 차원에서 사업을 심의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R&D 예타’는 원천 기술 개발 때 사업성을 지나치게 따지고 기간도 오래 걸려, 과학기술계가 오래전부터 폐지를 요구해 왔던 제도다.

28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 달 9일 국가 재정 전략 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R&D 시스템’ 개편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R&D 카르텔’을 지적한 지 10개월 만이다.

이번 개편안은 예타를 없애 미래 원천 기술 개발에 신속하게 착수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부처별 ‘예산 나눠 먹기’를 방지하기 위해 범부처 차원에서 과제를 통합 심의하는 것이 핵심이다. 과학계의 숙원을 수용하고, 당초 정부가 목표로 한 ‘R&D 카르텔’ 혁파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보다 4조6000억원 삭감된 R&D 예산은 내년에 복구될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부처 간 나눠 먹기 등 국가 R&D 시스템의 비효율을 지적했다. 이후 시스템 효율화 작업 중 올해 R&D 예산이 대폭 삭감됐고 과학기술계는 반발했다.

이번에 폐지되는 예타는 양자 기술 등 500억원 이상 대형 사업의 경우 거쳐야 하는 것이다.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려, R&D 글로벌 경쟁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또 기획재정부가 각 부처에 배분했던 R&D 사업도, 범부처가 협력해 심사하는 구조로 바뀐다. 비슷한 과제에 예산을 나눠주기보다, 시급한 대규모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번에 ‘R&D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는 것은 내년 예산 증액 전에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효율적인 시스템이 없다면 R&D 예산을 늘려도 예전의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번 예타 폐지와 부처 간 중복·유사 예산 문제 해결이 과학계의 R&D 카르텔 문제를 혁파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쟁력 발목 잡던 예타 폐지

예타는 500억원 이상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때 사전에 엄격한 평가를 진행하는 제도다. 재정 낭비를 막겠다는 취지로 2008년 도입됐다. 지난 15년간 314개 사업의 예타가 실시돼 그 가운데 184개 사업(약 62조1000억원)이 수행됐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에서는 예타가 R&D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해왔다. 예타는 5~10년간의 자세한 연구개발 계획과 연도별 목표, 구체적인 성과물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첨단 분야에서 장기간의 계획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제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한번 계획이 확정되면 이후 이를 바꾸지 못한다. 예타 통과를 위해 안정 지향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주변 상황이 바뀌는데도 수년간 필요 없는 연구·개발을 해야 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특히 예타 심사 기간은 7개월로 정해져 있지만, 보통 1년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특히 정치적 쟁점이 있는 경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 과학 기술 플래그십 프로젝트 사업’이다. 8년간 9960억원을 들여 양자 컴퓨터, 양자 통신 분야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골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4월 예타를 신청해 그해 말 통과를 목표로 했지만, 한 차례 연기됐다. 보완 과정을 거쳐 다음 달 통과를 기대하고 있으나, 한 번 더 연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내년 예산 반영이 불확실하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기술적 불확실성이 큰 신생 분야라 3년 뒤의 일을 알 수 없는데, 평가 기관에서 원하는 장기 계획 자료를 다 맞춰야 하는 실정”이라며 “산업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중요한 사업이지만,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등에서는 양자 기술에 전폭적인 지원를 하는 만큼, 국내 양자 경쟁력이 뒤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R&D 예타를 폐지하지만, 누리호 등 대형 장비가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선 경제성 평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현재 제도처럼 운영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매년 평가·점검하며 수정해 나가는 방식이 유력하다”며 “급변하는 기술 환경에 맞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자 기술 외에도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개발에 속도가 날 전망이다.

◇”효율적 운영 방안 마련돼야”

전문가들은 예타를 폐지한 만큼 R&D 평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우선 과제 선정 때부터 민간 전문가를 더 많이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미국·일본 등 주요국들은 대형 R&D 투자에서 사전 평가 체계를 두고 있다. 일본의 경우 각 부처가 300억엔(약 2600억원) 이상의 사업을 대상으로 사전평가를 실시한다. 우리나라의 예타는 사업의 당락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지만, 일본의 사전평가는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심사한다. 한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는 “결국 대형 R&D 사업의 목표는 잘 보완해서 일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기존 예타 제도의 목표는 떨어뜨리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한 전문가는 “과학기술뿐 아니라 경제·정책 전문가들도 포함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민간 전문가에게 책임프로젝트관리자(PM)를 맡겨 혁신 연구·개발을 기획하고 관리한다. 기업의 R&D처럼 계획을 중간중간 수정하면서 성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민간 전문가들에게 확실한 책임을 묻되 그만큼 자율성도 보장하면 혁신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국가 재정 전략 회의에서 R&D 복원 방향도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 R&D 시스템을 효율화한 만큼 이에 맞춰서 예산을 복원할 뿐 아니라 증액도 하겠다는 것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

500억원 이상 대규모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대해 일반 R&D 사업보다 더 엄격히 경제성을 평가하는 제도. 재정 낭비를 막기 위해 2008년에 도입됐다. 선진국에서도 대규모 R&D 사업에 대해 사전평가를 하지만, 한국의 예타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심의 통과 여부에 중점을 두는 반면, 미국·일본 등의 사전평가는 사업 계획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보완하고, 단순 경제성보다 다른 연구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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