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

기자 2024. 4. 28. 20:4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후대는 엉망진창 우당탕쿵탕 흘러가는 이 사태를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민희진 기자회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과 형식 간 모순이 압도적이다. 요컨대 기자회견이라면서 기자들이 한 일이 별로 없다. 있었다면 민희진 대표의 비상하고도 비장한 말하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 일이다. 돌이켜 보면 기자가 아닌 다른 누가 말을 거들었어도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이라니, 이런 당착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실은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역대급 드라마가 펼쳐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 보면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회견을 시작하자마자 셔터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민희진 대표는 돌연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나왔는데, 사진기자 때문에 말을 못하겠다고. 이후 진행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듯했지만, 민희진 대표는 곧 기자회견장을 공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계속된 중계에도, 회견 후 한 시간도 안 돼 터지기 시작한 인터넷 반응에도,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어진 전방위적 논란에도 언론의 존재감은 없다. 오직 민희진 대표와 그 상대방이 기획하고, 선택하고, 주의 깊게 준비해 실행하고 있는 미디어 이벤트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민희진 기자회견’은 한국 연예언론의 조용한 파산을 증거한다. 방송연예라 해야 할지, 오락산업이라고 해야 할지, 문화계 중 특별분야라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유명인 담당이라 해야 할지 구별할 수 없는 이 분야에 언론의 독자적인 취재가 별로 없다. 사업자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홍보와 선전을 걸러주는 해설이 없다. 이해당사자 간 이전투구를 중재하는 3자적 개입도 없다. 인터넷 동영상 채널이나 게시판 인기글보다 믿음직스러운 목소리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민희진 기자회견’급 사태가 터지더라도 주류 언론에서 참조할 만한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 최고의 연예뉴스는 ‘유퀴즈온더튜브’이고 가장 인터뷰를 잘하는 연예기자는 유재석이다.

연예부문만 이런 게 아니다. 스포츠도 그렇고, 외신도 마찬가지다. 학술출판 분야도 유사한 방식으로 빠르게 언론 기반이 와해하고 있다. 언론사마다 단 몇명씩만 남아 주요 사안들을 접시돌리기 하듯 다루기도 바쁜 가운데, 해당 취재분야에서 갈등과 내홍이 불거져 결국 곪아 터질 지경이 되더라도 누구를 취재해서 어떤 맥락에서 써야 할지 모른다. 아니 모른 체한다. 민희진 대표가 방언처럼 터져나와 한 말 가운데 ‘언론도 대기업이 뿌리는 거 막 받아쓰지만 말고, 가난한 쪽 이야기도 써 달라’고 하다가, 갑자기 협박조로 언조를 바꾸어 ‘내가 보겠어. 네가 그렇게 하는지’라고 쏘아붙인 바로 그 말이 겨냥한 태도로 말이다.

한국 언론에 정치가 과잉이라서 문제라고 한다. 나는 그 과잉이라는 정치언론도 과연 얼마나 잘하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비정치 영역에 언론의 역할이 빈약한 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정치에만 권력자가 있고, 정치영역에서만 권력이 부패하는 게 아니다. 연예계도, 스포츠계도, 그리고 전통적인 취재분야로 분류를 거부하는 유명인의 세계에도 권력을 남용하고, 지배력을 농단해서 사익을 추구하고, 모사꾼처럼 거짓말하고 이간질하며, 진짜처럼 나대는 사짜들이 있다. 이들의 타락을 고발하는 탐사보도를 읽고 싶다. 간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보고 싶다. 그들이 구축한 주술적 논리를 파헤치는 해설기사를 읽고 싶다. 그런 기사를 쓰는 기자를 만나고 싶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