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1998
기자 2024. 4. 28. 20:44
폐업 포스터를 뜯어
딱지를 접는 소년
뜯어진 담장마다
개들이 다리를 들어 올리고
건너편 공장에 트럭이
며칠째 넘어가지 않는다
딱지를 내려칠 때마다
탁탁 붙었다 터지는 골목
그때 민들레 홀씨 하나가
어쩔 수 없이 날아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소년은 이상해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물어 오지 않는 개와
얼굴을 가리고 우는 사람들
공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까지
소년은 납작한 노을을 주워
무릎을 편다
고개를 들어 짖기 시작하는 개들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
딱지를 벗어난다
소년은 이제 저녁을
한 발자국도 접지 않고 걷는다
박한(1985~)
소년의 오래된 기억 속에는 상가마다, 공장마다 “폐업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닫힌 문들에 간신히 매달려, 믿을 수 없다는 듯 폐업 포스터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외로운 소년은 그 포스터를 뜯어 “딱지를 접”었다. 소년이 “딱지를 내려칠 때마다” 스산한 골목은 “탁탁 붙었다 터”졌다. 그때였다. 소년은 “민들레 홀씨 하나”가 “어쩔 수 없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1998년. 망해버린 시간들이었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얼굴을 가리고 우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때 날아간 민들레 홀씨는 어디에서 꽃을 피웠을까? 어느새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2024년을 살고 있다. 폐업 포스터 대신 텅 빈 가게 유리문에 붙은 ‘임대’ 두 글자가 몰락해 가는 골목을 바라보고 있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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