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문지… 흔적기관과 그들의 자리 [1인칭 책읽기]

이민우 기자 2024. 4. 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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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창비와 문학과지성사 기념시인선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각각 500호 기념시인선, 600호 기념시인선을 발간했다.[사진=펙셀]

4월 어느 날, 대형 서점의 한편. 출판사 창작과비평(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기념시인선이 나란히 전시돼 있었다. 두 출판사가 지금까지 편찬해온 시집이 각각 500호(창비), 600호(문학과지성사)를 맞은 것을 기념해 발간한 책이었다.

창비는 3월 27일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란 시선집을 펴냈다. 400번대의 창비 시집에서 시를 한편씩 골라 담았다. 문학과지성사는 4월 3일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를 펴냈다. 500번대 시집의 뒤표지에 담긴 글들을 모았다.

이들의 시집은 한때 시대를 이끌어 나간 금자탑이었다. 문학과 지성사는 4ㆍ19 혁명의 세대를 자처하며 "시대의 병폐인 패배주의와 샤머니즘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했다. 창작과비평 역시 민족 문학과 통일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요구했다. 이것은 기존 문학관을 향한 도전이자 일종의 운동이었으며 거대한 미학적 실험이었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무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작금의 시집들이 과거에는 시대를 해부하는 날카로운 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문학은, 취향 군중을 위한 서브컬처로 우리들의 곁에 남아 있다. 이제 책이라기보단 일종의 팬시 상품 같아진 이 두 기념시집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의 문학의 위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수집용으로 만들어진, 봄날의 꽃들이 그려진 수첩과 함께 놓인 두 기념시집을 한참을 바라보다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수백권의 시집을 낸 출판사는 이들 두 곳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년의시작도 400호를 채웠으며 민음사와 문학동네 역시 수백권의 시집을 냈다. 그런데도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기념호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두 출판사가 가지고 있는 특질特質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세월호 사건을 다룬 책을 찾다가 창비에서 나온 책이 많다는 걸 확인한 적이 있다. 창비는 창비다웠다.

창비의 사회 참여적 지점,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의 미학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지점은 오늘날 좋은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1970년과 198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정신이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유효할 수만은 없다.

4ㆍ19혁명 정신을 매주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촛불시민 사이에서 찾는다 해도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민중과는 또 다른 결을 갖는다.

매체 환경도 변했고 문학계도 큰 변화가 있었다.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신경숙 표절 사태와 '#문단_내_성폭력'을 거치며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를 향한 비판이 있었다. 출판사의 권위를 이용해 문학계 내에 부조리를 행사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이런 비판의 목소리는 언제나 문학계 밖에서 나왔고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그사이 좋은 문학의 기준은 끊임없이 변했다. 미래파에서 여성주의로, 퀴어와 정체성 정치, 재현의 윤리를 지키기 위한 자전적 소설들, 그리고 다시 재현의 윤리로부터 좀 더 자유롭기 위해 SF를 도구로 소환하기까지.

좋은 문학의 기준선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오래도록 지켜지는 거시 담론은 없었다. 물론 이 유행조차도 대형출판사의 입김이 작용했지만 그들과 별도로 독립문학들이 쏟아져 나오며 다양성이 지켜졌다.

커다란 우주를 꿈꾸던 문학은 이제 각자만의 우주를 가진 움직임으로 가득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과거처럼 세상을 이끄는 거시담론은 희미해졌다. 그 자리에는 미시담론, 서로의 믿음이 대신한다. 그래서 문학계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방향성을 잃고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작은 우주들이 빅뱅을 일으키며 꿈틀거리고 있다.

한국의 문단문학은 이제 주류문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거시담론의 흔적기관痕跡器官(쓸모없이 흔적만 남아 있는 부분)처럼 남은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시집 역시 자신만의 위치가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는 문학이, 팬시처럼 힙해진 문학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리고 나도 자신만의 좋은 문학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 내 안에 작은 서브컬처를 품어보면 어떨까.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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