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황 나훈아 "내 혼이 빠져나가는 듯하지만…이제 마이크 놓는다"
"내가 그만두는 걸 서운해하실 때 그만두려…5년 전부터 생각"
"길게도 기적처럼 오늘까지 걸어왔다"
(인천=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저는 솔직히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시원섭섭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고 평생을 해 온 일이라 속에 있는 내 혼이 다 빠져나가는 그런 이상한 기분입니다."
가수 나훈아는 28일 오후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24 고마웠습니다 - 라스트 콘서트' 인천 공연에서 "'그래 이제 니 그만해도 되겠다' 하고 서운해하지 않으시면 돌아서는 제가 얼마나 슬프겠느냐"며 "여러분이 '그래 서운해, 더 있어라' 할 때, 박수칠 때 (그만두려 했다)"며 이같이 은퇴 소감을 털어놨다.
나훈아는 스스로 밝힌 데뷔 연도인 1967년 이래 '무시로', '잡초', '홍시', '물레방아 도는데', '청춘을 돌려다오' 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사랑받았다.
그는 2020년 추석 연휴때 KBS 2TV가 방송한 특별 콘서트에서 부른 '테스형!'이 전국적인 히트를 하며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고, 공연을 여는 족족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 몰이를 이어갔다.
나훈아는 그러던 도중 올해 2월 돌연 은퇴를 시사했고, 이번 콘서트 투어 이름을 '라스트 콘서트'로 명명했다.
나훈아는 이날 공연에서 "저는 마이크가 참 많이 무서웠다. 우리 후배들이 그 무서운 것을 알면 그때부터 진짜 가수가 될 것"이라며 "여러분, 저는 이제 마이크를 내려놓으려 한다"고 말해 은퇴를 못 박았다.
나훈아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은퇴 계기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이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하면 한 5년 전"이라며 "지방에 공연하러 갔는데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나를 보고 '오빠!'라고 하더라. 누가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세월이 이만큼 온 것도 저는 몰랐다. 저런 분이 나를 보고 오빠라고 할 정도로 오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정말 기적처럼 오래 했다. 정말 힘들게 오래 했다"고 덤덤히 읊조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시선을 사로잡기로 유명한 그는 이번에도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는 듯이 시작부터 좌중을 휘어잡았다.
오프닝곡 '고향역'에 이어 댄스곡 '체인지'(Change), '고향으로 가는 배', '남자의 인생', '물레방아 도는데, '18세 순이'까지 6곡을 쉬지 않고 열창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무대 의상도 여러 차례 갈아입었다. 그것도 무대 위 관객 앞에서 반투명 가림막을 설치하고 그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대범한 쇼맨십을 선보였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나훈아가 입은 의상 가짓수는 15벌 이상이었다.
나훈아는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와 먹잇감을 찾는 듯, 혹은 사랑하는 연인을 찾는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을 자랑했다. 70대에 핑크색 '시스룩' 망사 의상도 보란 듯이 소화한 그가 시선을 옮길 때마다, 팔을 '휙'하고 뒤로 넘길 마다 장내를 가득 채운 관객은 환호를 보냈다.
지금까지 1천200곡이 넘는 노래를 직접 만들었다는 그의 우리말 가사에는 우리네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고장난 벽시계),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다 어리석다는것을' (공), '그냥저냥 사는 것이 똑같은 하루하루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리고 캔 맥주 한잔' (남자의 인생) 같은 가사는 관객 한명 한명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듯했다.
나훈아는 "우리 전통가요란 우리 삶을 그때그때 맞춰 (따라) 내려가는 것"이라며 "(가사로) 속을 살살 헤집고 뒤집고 돌리고 날리는 것"이라고 짚었다.
나훈아는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입담으로도 관객을 헤집어 놨다.
그는 저출산 문제를 지적하며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라도 낳아야 한다"며 '청춘을 돌려다오'를 불러제껴 관객의 배꼽을 빼놓았다.
이날 콘서트의 백미는 나훈아다운 '은퇴 퍼포먼스'였다.
그가 공연 말미에 "저는 마이크가 없어서 이제 노래를 못 부른다. 여러분이 대신 불러달라"고 말하니 공중에서 드론이 나타났다. 나훈아는 이 드론에 마이크를 떠나보낸 뒤, 멀리 사라지는 마이크를 향해 힘차게 거수경례하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57년 가수 인생 마무리를 앞둔 베테랑다운 피날레였다.
이날 공연장 인근은 나훈아의 마지막 전국투어인 만큼 일찌감치 남녀노소 관객들로 북적였다.
광주에서 올라온 1945년생과 1950년생 김모 씨 자매는 나훈아를 보고자 각자의 남편들과 함께 멀리 광주에서 인천까지 찾아왔다.
이들은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2020년 KBS 특집 프로그램에서 '테스형!'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며 "오늘이 생일(언니)인데 다 필요 없고 나훈아 콘서트 표를 달라고 자녀에게 말했다. 직접 보게 된다니 흥분되면서도 은퇴한다니 섭섭하다"고 말했다.
나훈아 팬클럽 '나사모'(나훈아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은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고 들뜬 표정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이들은 '가황 나훈아!'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도 걸고 '오빠'를 응원했다.
나사모 회장 한유섭(62)씨는 "그분의 노래에는 우리가 표현하지 못할 울림과 감동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빠져들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며 "10살 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목에 있던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머나먼 고향'을 듣고 마음에 무언가 두근거림이 느껴져 팬이 됐다"고 말했다.
나훈아는 원주, 청주, 울산, 전주, 천안 등지에서 전국투어를 이어간다.
"가수는 사람마다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런티가 밀리면 그냥 밀리는 겁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늘 시대를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까지 왔습니다…길게도 기적처럼 걸어왔습니다."
ts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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