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개펄 내달리며 환경 재앙을 절규하다

노형석 기자 2024. 4. 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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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리도 남단 해변의 예술 난장 눈길
한국 등 다국적 작가들 개펄 배경 퍼포먼스 펼쳐
주데카 섬에선 합동기획전 ‘노마딕파티’도 열려
스페인 작가 기예르모 루이스가 지난 20일 베네치아 남쪽 펠레스트리나의 해안 제방 위에서 한지 드레스를 입은 채 색실덩이를 들고 활보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다국적 작가 모임 나인드래곤의 구성원으로 10여년간 활동해왔다.

“베네치아에서 우린 너무 멋지게 지내고 있잖아. 그 아래쪽 어촌과 개펄은 상처 받고 있는데!”

제주도산 한지 드레스를 입고 한지 뿔모자를 쓴 스페인 시각예술가 기예르모 루이스가 영어로 외쳤다. 그는 바닷가 제방 위를 마구 뛰어다녔다. 양손으로 날갯짓하면서 ‘헉, 꾸르륵, 헉’ 신음 소리를 냈다. 쏴아쏴아 소리를 내면서 일렁이는 아드리아 해의 바다가 제방을 달리는 그의 옆으로 펼쳐진다. 바다를 지켜보면서 쉬지 않고 넋두리 혹은 신탁 같은 말과 몸짓을 쏟아내고 달렸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한다. 루이스는 색실 덩이를 입에 머금었다가 따라온 작가들에게 던지면서 다시 내뱉었다. “우린 너무 많이 먹고 펑펑 써댄다구!”

작가들이 화답한다. “미안, 미안해요! 잘못했습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공식개막한 지난 20일 낮 베네치아 본섬 남쪽 펠레스트리나 섬의 해안 개펄 지대에서 펼쳐진 제의 같은 풍경이었다. 이날 환경 재앙에 직면한 섬의 현실을 되짚는 국제 예술가집단의 다채로운 연대 퍼포먼스 마당이 섬 곳곳을 수놓았다. 올해로 활동 30년째를 맞는 16개국의 다국적작가공동체 나인드래곤헤즈에서 작업 중인 한국과 유럽 작가, 기획자 등 40여명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전 본섬에서 보트를 타고 1시간가량을 항해한 끝에 해안 개펄 지대에 도착해 떼거리로, 혹은 개별적으로 움직이면서 각기 몸짓 난장을 벌이기 시작했다.

펠레스트리나는 베네치아를 둘러싼 석호(개펄호수)와 아드리아해 사이에 있는 길이 12㎞에 불과한 섬이다. 과거엔 베네치아와 경쟁한 도시국가 제노바와 막강한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을 막는 전초기지였고 베네치아 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 어업의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하지만 지난 30여년 사이 기후 온난화로 만조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 와 베네치아가 침수되자 이를 막기 위한 모세프로젝트의 거대한 물막이 댐이 2020년 섬 남단에 설치되면서 위기가 닥쳤다. 해수 유입이 차단되자 전통적인 어업기반을 잃고 섬 자체가 황폐화할 상황에 부닥쳐있다. 평시엔 바닷속 바닥에 가라앉았다가 특별한 때만 수면 위로 불뚝 솟는 이 댐이 옛적 베네치아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어촌 섬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작가들의 퍼포먼스 무대는 모세프로젝트의 인공 방벽이 세워진 지점 부근의 제방 해안이었다. 전체 작가 40여명이 둑길에 앉아 일제히 검은 망원경을 쓰고 신음하는 바다와 개펄을 주시하거나 기예르모 루이스처럼 펄렁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절규하며 해안가를 뛰거나, 방효성 작가처럼 나뭇가지를 몸과 손에 두르고 바다로 가는 사슴을 흉내 내는 등의 다기한 몸짓 예술 무대가 계속 이어져 나갔다.

“펠레스트리나의 푸른 하늘과 바다, 흐린 구름을 함께 보고 몸으로 움직이면서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네덜란드의 설치미술 대가 해롤드 드 브리가 이날 제방 퍼포먼스에 대해 털어놓은 소회는 의미심장했다. 조수 차단 댐 건설로 비롯된 베네치아 변두리 어촌의 생태적 위기 상황과 이를 몸짓과 말로 표현한 여러 나라 이방인 예술가들의 현장 예술 난장은 이방인이란 비엔날레 전시 주제와도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의미를 발산했다는 자평이 나왔다.

스페인 작가 기예르모 루이스가 지난 20일 베네치아 남쪽 펠레스트리나의 해안 제방 위에서 한지 드레스를 입은 채 색실 덩이를 물고 활보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이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다국적 작가 모임 나인드래곤의 구성원으로 10여년간 활동해왔다.

나인드래곤은 1995년 한국의 대청호 야외 환경미술제를 기점으로 결성돼 지난 20년간 노마드(유목적) 예술을 기치삼아 한국과 국외에서 다양한 현장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한 다국적 작가공동체 모임이다. 펠레스트리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기요르모나, 거장 해롤드 브리, 미국작가 가브리엘 아담스, 칠레작가 엔리크 가르시아 등은 한국 작가들과 어울려 20여년간 서울, 제주, 비무장지대 등을 돌면서 다채로운 현장 연구와 행위예술, 설치작업 활동을 펼쳐왔다.

박병욱 작가는 “막연하게 작품을 설치하고 옮기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서로의 나라를 돌면서 깊이있게 현장 탐구를 하고 서로 교류하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있는 작업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기후이상과 환경파괴가 빚어낸 베네치아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베본섬 아래 주데카섬의 옛 양조장을 개조한 전시공간 스파지오 펀치에서 19일 개막한 나인 드래곤 작가들의 기획적 ‘노마딕 파티’(커미셔너 김찬동 기획자)의 개별 출품작들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0일 베네치아 남쪽 펠레스트리나 섬의 제방 위에서 작가와 기획자들이 일제히 작은 망원경을 눈에 들이대고 아드리아해의 바다를 주시하는 집단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펠레스트리나는 베네치아를 둘러싼 석호(개펄호수)와 아드리아해 사이에 있는 섬이다. 만조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베네치아가 침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모세프로젝트의 거대한 물막이 댐이 2020년 섬 남단에 설치돼 전통적인 어업기반을 잃고 섬 자체가 황폐화할 상황에 처해있다.
지난 20일 오후 먹구름이 밀려오는 펠레스트리나 어촌 포구에서 춤꾼 모지민씨가 소리꾼 성상식씨의 북과 징 반주에 맞춰 즉흥 춤판을 펼치고 있다. 모지민 춤꾼 옆에서 이지송 작가가 영상을 찍는 모습도 보인다.

한국 작가 15명(이지송·박영훈·구성균·금사홍·황석봉·김결수·권기자·김영진·방효성·황란·심영철·바니아 오·백문혜·장혜홍·최인숙)과 20개 나라 작가 30여명의 다양한 매체 작품들이 천장이 높고 길쭉한 전시장에 빽빽하게 자리해 그들 나름의 베네치아 환경 탐구를 보여주었다. 백문혜, 최인숙, 장혜홍 작가 3인의 공동 섬유예술 설치작품인 ‘베니스아리랑’과 금사홍 작가의 현지 나뭇조각+풍경 드로잉, 황란 작가의 벽걸이 설치물, 바니아 오 작가의 두루미풍선캐릭터, 황석봉 작가의 기 그림, 현지 폐기물을 활용한 박영훈 작가의 호스형 설치작업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 작가들은 1년 전부터 서구 작가와 미리 현지에서 워크숍을 하면서 현지의 생태 지리와 지정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를 거쳤고, 박용훈, 금사홍 작가는 베네치아 남부의 해안가를 뒤져 수거한 폐기물과 나뭇조각 등으로 현지에서 재료를 조달해 신작을 만들었다. 개막일 당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제목으로 가위를 든 힘센 오른손이 무력한 왼손의 셔츠를 잘라서 뜯어내고 침을 찌르고 가해를 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효성 작가의 퍼포먼스는 전시에 정점을 찍는 일종의 의례처럼 보였다.

방효성 작가가 가위를 든 오른손으로 왼손의 셔츠 자락을 잘라내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다른 작가들의 서명을 자신의 셔츠에 받고 있다. 지난 19일 베네치아 주데카 섬에 있는 전시장 스파지오 펀치의 뜨락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이날 스파지오 펀치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16개 나라 작가들의 다국적 기획전 ‘노마딕 파티’가 막을 올렸고, 방 작가가 개막식 뒤 기념 퍼포먼스를 했다.

20일 오전 팔레스트리나 둑길에서 퍼포먼스를 마친 일행은 인근 포구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풍성한 해산물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하늘 한켠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스산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전통 타악기 주자인 성상식 소리꾼이 북과 징을 슬근슬근 치면서 분위기를 돋우자 발레리노 출신의 춤꾼 모지민씨가 포구의 둑 위에 뛰어올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먹구름 아래 두두두두둥 북과 징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 춤꾼이 몸을 뒤틀고 손을 양어깨 위로 쳐들면서 격렬하면서도 나긋하게 춤판을 이어간다. 이를 본 스페인 작가 루이스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고 내리치며 맞장을 뜬다. 산조가락처럼 흥이오르고 리듬이 빨라지자 퍼포먼스도 격렬해진다.

스파지오 펀치에 마련된 ‘노마딕 파티’ 전 현장. 백문희, 최인숙, 장혜홍 작가 3인의 공동 섬유예술 설치작품인 ‘베니스아리랑’과 금사홍 작가의 현지 나뭇조각+풍경 드로잉, 황란 작가의 벽걸이 설치물, 바니아 오 작가의 두루미풍선캐릭터, 황석봉 작가의 기 그림, 현지 폐기물을 활용한 박영훈 작가의 설치작업 등이 다른 나라 작업들과 섞여 있다.

신명 나는 춤판을 마치고 돌아가는 배에 올랐을 즈음 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석호 위로 우박의 소나기가 쏟아진다. 차박차박 소리와 함께 수백 수천개의 큰 동심원이 여기저기 펑펑 터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하늘도 기후변화 퍼포먼스를 하면서 우리와 기운을 맞추었다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펠레스트리나의 답사 퍼포먼스는 신음하는 자연과 예술가들의 찰떡같은 어울림과 스며듦이 돋보이는 한판이었다.

베네치아/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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