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핸드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4. 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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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는 관중들의 수가 100여명을 넘지 않았다. 묘기가 터져도 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매스컴(언론)에서도 잘 다뤄주지 않았다. 외로운 경기였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한국 여자 핸드볼의 실태를 다룬 언론 보도의 한 대목이다.

그나마 이 기사조차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은메달을 딴 뒤에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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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는 관중들의 수가 100여명을 넘지 않았다. 묘기가 터져도 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매스컴(언론)에서도 잘 다뤄주지 않았다. 외로운 경기였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한국 여자 핸드볼의 실태를 다룬 언론 보도의 한 대목이다. 그나마 이 기사조차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은메달을 딴 뒤에야 나왔다. 동서 냉전이 극심하던 시절 열린 LA 올림픽은 미국에 반대하는 소련(현 러시아)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하면서 ‘반쪽짜리’로 치러졌다. 동구권 나라들의 올림픽 불참 때문에 대리 출전한 한국이 큰일을 해낸 셈이다. 시상대에서 펑펑 우는 여자 핸드볼 선수들을 지켜보며 언론은 “비인기 종목이란 그늘에 가려 농구나 배구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따뜻한 박수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그들 앞에 온 세계인들이 한데 모여 축복을 보내고 있는데 너무 많은 감회가 엇갈린 것”이란 평가를 내리며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직전 서울 올림픽(1988)에 이은 금메달 2연패를 달성한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후 한국 여자 핸드볼의 역사는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4년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2연패까지 여자 핸드볼 선수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울리고 또 웃겼다. 평소 핸드볼에 애정이 없던 이들조차 올림픽 시즌만 되면 ‘여자 핸드볼에서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하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득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에서 한국이 덴마크에 아깝게 져 은메달에 그쳤을 때 지인들이 보인 반응이 떠오른다. 올림픽 3연패가 힘든 일이라는 데에는 다들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이 은메달 이상은 딸 수 있는 나라라고 자신했다. “비인기 종목이란 그늘에 가려” 올림픽 시즌 말고 평상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여자 핸드볼의 선전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지 염려하는 이는 없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노메달’로 마친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시 은메달을, 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동메달을 각각 따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아테네 올림픽 때 우리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의 활약상은 ‘우생순’이란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400만명 넘는 관객이 본 이 작품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솔직히 국내 스포츠 팬들은 핸드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올림픽 시즌이 다가오면 ‘이번에 여자 핸드볼이 한 건 해낼 것’이란 기대감을 갖는다. 행여 성적이 좋지 않으면 “요즘에는 과거와 같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 큰일이야”라고 탄식하며 혀를 끌끌 찬다. 오랫동안 스포츠를 오로지 ‘국위 선양’의 틀 안에서만 바라본 한국 엘리트 체육의 한계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 출연한 배우들이 제작 보고회에 참석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엄태웅, 김정은, 문소리, 김지영, 조은지. 세계일보 자료사진
남자 축구 대표팀이 26일 U-23(23세 이하)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인도네시아에 뜻밖의 일격을 당하며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로써 오는 7월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에 한국은 남녀 단체 구기종목 가운데 여자 핸드볼만 참여할 수 있게 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 이후 메달권에서 멀어진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셈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핸드볼에 무관심하다가 올림픽 때에만 ‘메달 가능 종목’ 어쩌고 하며 치켜세우는 행태만큼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이 비인기 종목의 서러움을 딛고 올여름 파리에서 메달 여부나 그 색깔 등에 연연함 없이 후회 없는 경기로 저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당당히 귀국하길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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