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궁금해도 참아 본다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한겨레 2024. 4. 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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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유성, ‘Under the Sea’, 2023, 캔버스에 유채, 140×140㎝, 갤러리마크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어여쁜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은 그냥 지나치지만, 간혹 그 꽃의 이름이 궁금할 때가 있다. 요즘엔 검색을 미룰 필요도 없이 휴대폰으로 사진 한장만 찍으면 바로 이름이 화면에 뜬다. 그렇게 한번 이름을 알게 된 꽃은 여타 꽃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럿 사이에 뒤섞인 모호한 상태를 탈피하여 명확한 존재로 기억된다고나 할까.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캐럴 계숙 윤이 쓴 책을 읽었다. 누군가는 자연의 생명체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을 것인데, 그리스도교 성경에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그 일을 맡았다고 씌어있다. 실제로 혁혁한 공헌을 한 사람은 스웨덴 출신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였다.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쯤 전에 그는 생명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분류된 것에는 이름을 매겨두었다. 어릴 적 수업시간에 배웠던 ‘종·속·과·목·강·문·계’가 바로 린네가 만든 분류체계이다.

린네 이후 분류학은 놀라운 발전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분류 방식이라고 할 지라도 모든 생명체에 완전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캐럴 계숙 윤은 ‘움벨트(Umwelt, 독일어로 주변 환경이라는 뜻)’를 강조한다. 생명체는 오랜 세월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고,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을 변화시켜 온 것이다.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것들은 대부분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세상에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부를 이름이 마땅히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분류란 그저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외부에서 누군가에게 이름을 부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시대에는 과거에 필연적이라고 여겼던 분류체계가 의심되기도 한다. 최근 독일에서는 마치 이름을 바꾸듯이 자신의 젠더를 바꿀 수 있는 법이 통과되었다. 전문가의 소견서도 요구되지 않고, 오직 본인의 결정만으로 자신이 여자라거나 남자, 혹은 성별을 분류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선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당황스럽겠지만 이제는 기존에 붙여진 이름에서 벗어나 대상을 보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미술품에도 이름이 있다. 작가가 붙인 작품의 제목이 이름인 셈이다. 제목이 없이 번호만 붙어있거나, ‘무제’라고 씌어있는 미술품을 전시장에서 마주치면, 역시 당황스럽다. 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한편으로는 관심을 모아주고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정된 시각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미술가는 자기 작품의 의미가 한낱 몇 글자의 제목에 국한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무제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관람자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열린 상태로 작품을 받아들이기 바라면서.

지난주에 제유성의 개인전에 갔었다. 벽에는 그림만 걸려있을 뿐 라벨이 딸려있지 않아서 별도로 유인물을 보면서 제목을 확인해야 했다. 요즘엔 이런 식으로 라벨 없는 전시회가 많다. 아마도 문자가 주는 선입견 없이 그림에만 몰입해 보라는 권유인 듯하다. 나는 어떤 파란 그림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공기 중에 꽃가루가 날리고 저 멀리 동그란 언덕들이 겹겹이 어우러져 있는 듯했다. 코가 간질간질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바다 밑에서’라는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금세 바닷속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꽃가루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닷속 기포처럼 느껴졌고, 상어의 지느러미 같은 것도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지만 공기 부족으로 숨 막힐 수 있고, 구석에는 위협이 잠복하고 있었다.

제목이 붙은 그림을 보는 것은 제목에 의존하지 않은 채 이미지만 감상할 때와 느낌이 다를 수 있다. 분류되어 명확해진 것과 분류되지 않아 자유로운 것 사이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날 것 이미지의 의미는 미리 떠올렸던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가 이것 또는 저것으로 분류되지 않은 채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상태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름을 알고 싶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 순간이 곧 앎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무조건 이름부터 검색하지 말고, 찬찬히 그 특성을 관찰하면서 알아가는 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그 대상이 미술품이라면, 한 번쯤 궁금한 것을 참고 이미지만 감상해 보자. 의외의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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