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틀막' 논란과 프랑스 지식인의 한국 논쟁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4. 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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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18편
지금 읽어야 할 프랑스 지성史
사르트르·카뮈 등 유명 지식인들
한국전쟁 두고 격렬한 논쟁 벌여
친공·반공 둘러싼 극심한 분열상
공산체제 향한 비판적 태도 갖춰
자유로운 논쟁이 가능했던 프랑스
‘입틀막 논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한국전쟁은 남침이다. 이 의심할 수 없는 전제에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은 북침과 남침을 놓고 논쟁했다. 공산주의를 둘러싼 시각차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논쟁 때문에 프랑스는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 분위기는 미국발 매카시즘의 광풍을 몰아냈다. 무언가 '다른 의견'이 틀어막히는 지금, 우리가 들춰봐야 할 지성의 역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지식인들은 전쟁 원인을 놓고 논쟁했다.[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지원군을 파병하기로 했다. 다만,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건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곳이 인도차이나반도와 알제리였다. 주요 병력이 식민지에 주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1개 대대 남짓한 병력만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소수 병력의 프랑스군은 한국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랄프 몽클라르 장군은 자진해서 중령(대대장)으로 계급을 낮추고 파병된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프랑스군은 지평리 전투(1951년)에서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화살머리 고지 전투 등에서도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 국경 부근에 주둔한 200만명이 넘는 중국군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역시 중국이 홍콩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은 맥아더가 주장하는 확전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정작 프랑스에서 전장의 열기보다 뜨거웠던 것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논쟁이었다. 드레퓌스 사건(1894년)을 계기로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사회 참여는 일종의 의무로 굳어졌고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사르트르, 아롱, 메를로 퐁티, 카뮈 등 프랑스 지식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년)는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의 보도를 신뢰하면서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팽창정책에 반대하는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을 편향적으로 해석했다. 당시 프랑스에선 1947년에 출판된 영국 작가 아서 케스틀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낮의 어둠」은 정적을 잔혹하게 제거한 스탈린의 폭력과 소련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한 작품이었다. 독자들은 소련의 실상에 경악했다.

그러나 철학자 메를로 퐁티(1908~1961년)는 공산주의의 폭력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두둔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반면 사회학자 레몽 아롱(1905~1983년)은 스탈린의 계획적인 도발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주장을 반박했다. 레몽 아롱과 함께 사르트르에게 반기를 든 사람은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년)였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보다 앞서 1934년에 이미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 출신인 카뮈는 스탈린이 프랑스 공산당에 이슬람교 지지를 철회할 것을 강요한 것을 계기로 공산당에서 탈퇴했다. 전후 카뮈가 발표한 「페스트(1947년)」와 희곡 「계엄령(1948년)」은 전체주의의 폭력을 경고하는 텍스트였다. 카뮈에게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소련 정치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공산주의의 종교관에 동조할 수 없었다.

"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혹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카뮈는 「페스트」의 등장인물 타루의 입을 빌려 전체주의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논쟁을 거치면서 반독일 저항운동 동지였던 카뮈와 사르트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졌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에서 벌어진 참상이 드러나자 메를로 퐁티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사르트르와 결별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반동적인 식민지 정책을 고수했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한국전쟁이 휴전한 이듬해 프랑스의 주력 부대는 디엔비엔푸에서 호찌민의 베트민군에게 대패(1954년)했다. 인도차이나를 상실한 후에도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고, 곧바로 알제리 전쟁(1954~1962년)에 휘말렸다. 전후에 태어난 프랑스 청년들은 냉전 질서를 신봉하는 기성세대를 향해 격렬한 반감을 가졌다. 이 세대 갈등은 훗날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1968년 5월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한국전쟁을 겪은 당사자인 우리에게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견해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20세기 지성사史의 중심을 차지한 프랑스 철학의 저력은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카이스트 학위 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던 윤석열 대통령에게 R&D 예산 삭감을 항의한 졸업생이 강제 퇴장당했다.[사진=뉴시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유롭게 사유하고 발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계를 끊을 정도로 격렬한 논쟁을 해도 '말할 수 있는 자유' 자체는 존중됐다. 프랑스에서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전개된 '사상과 언어의 전쟁'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이 논쟁을 통해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소련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견해에 다른 지식인들이 반박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소련의 실상이 드러났다. 또한 프랑스 사회와 대학에는 다른 견해를 지닌 상대를 존중하는 풍토가 견고하게 뿌리내렸다.

그 결과, 프랑스는 냉전 초기 미국이 빠진 '매카시즘'이라는 늪을 비껴갈 수 있었다. 타인을 존중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토론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것은 오랜 갈등과 교육의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정부에 항의하는 정치인, 학생 등의 입이 틀어막히는 지금, 여기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논쟁을 다시 읽는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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