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박수근의 가짜 그림 전시한 라크마는 답하라
세계적인 명문 미술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라크마)에서 지난 2월말부터 열리고 있는 기획전 ‘한국의 보물들’이 한국 미술계의 이슈로 떠올랐다. 국민화가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의 그림으로 소개된 출품작들이 전시가 시작된 직후부터 위작 의혹이 제기되자 국내 전문가로는 유일하게 출품작들을 직접 감정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과 한국 화랑협회, 박수근감정연구소가 지난 5일 라크마 쪽에 진품 판정 근거와 전시 경위 등을 묻는 공식 질의서를 보냈으나(한겨레 4월 5일치 18면 단독보도) 라크마 쪽은 보름 지나도록 묵묵부답이다. 윤 전 관장이 이번 사태에 대한 견해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미국 유명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들의 가짜 그림을 걸고 있다!
미국 서부 최대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라크마)이 2월 말부터 열고 있는 기획전 ‘한국의 보물들’을 두고 하는 지적이다. 전시는 체스터 장이란 현지 동포의 기증품 2백점 가운데 35점을 선정해 꾸린 것이다. 출품작들 가운데 인기 화가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이라면서 작가당 2점씩 진열했는데, 진위 문제가 제기되면서 논란 대상이 됐다.
2022년 라크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주최로 한국 근대미술 특별전 ‘사이의 공간’을 열었다. 그때 필자는 현직 관장으로서 서구 최초의 한국 근대미술품 전시를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 성심을 기울였다. 특별전은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한류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현지 개막식에 나는 직접 가서 전시 의의를 알리고 공동주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당시 라크마는 기증받은 한국 미술품들이 있다면서 내게 감정을 요청했다. 한나절을 할애하여 라크마 근교 수장고까지 갔다. 기증품 일부를 살펴보니 한마디로 수준 미달이었다. 특히 이중섭과 박수근 그림은 명백한 위작이었다. 나의 문제 제기에 라크마 쪽은 서면 감정서를 요청했다. 의외였지만 전문적 시각으로 감정서를 썼다. 기증품 목록 등재부터 신중하라는 나의 고언은 당연했다. 한국에 미술품 감정기구가 있으니 공식 감정 절차를 밟으라는 제안도 했다. 나는 오랫동안 감정업무를 했고, 한국미술품감정가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경험도 있다.
하지만 라크마는 ‘한국의 보물들’ 전에서 고미술품들과 함께 문제의 그림들을 전시했다. 1953년경 이중섭 작품이란 설명이 붙은 ‘황소를 타는 소년’은 대표적 도상들인 황소와 소년을 합성했다. 작가의 특징적 필치와 거리가 멀다. 일필휘지의 기운생동은 물론 골격 기초 데생조차 갖춰지지 않았다. ‘기어오르는 아이들’도 구성이나 필치 등에서 이중섭과 무관했다. 게다가 타일 위에 그린 도화(陶畫)라니 전례 없는 경우다. 이중섭 같은 대가들의 주요 작품이면 대개 소장처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듯 ‘족보’ 없는 신출 작품은 출처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중섭과 박수근 것이라는 출품작들의 원래 소장처가 궁금하다.
박수근 작이라는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는 기왕의 진작에서 이것저것 도상을 따와 짜깁기한 수준이다. 박수근 그림은 십자(十) 형태로 가로세로 바탕칠 하면서 회색조의 두툼한 질감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배경은 생략하고 선묘(線描) 중심으로 대상을 압축한다. 문제의 기증품은 박수근 회화의 특징과 무관한 수준이다. ‘와이키키’는 박수근 화풍과 아무 관계가 없는, 조악한 그림이다. 전쟁 이후 피폐한 한국 사회에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며 화필을 든 박수근 입장에서 본다면, 작가에 대한 모독이라 볼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가보지도 않은 하와이 해변을 낭만적으로 그려야 할까. ‘와이키키’만으로도 전시의 품격과 진위문제를 진단할 수 있게 한다.
위작이라 지적했음에도 라크마에 문제적 작품들이 전시 중이란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왜 무리수를 두었을까. 하여 출품작 도판들을 입수해 감정 전문가들과 검토해 보았다. 이 전시가 라크마의 명성이나 한국 미술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국내 대표 감정기구인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운영위원장 황달성)에 대책 마련을 요청했다. 저작권 소유자인 박수근 유족이 만든 박수근감정연구소(대표 박진흥)와 협력해 공개 질의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라크마의 마이클 고반 관장과 큐레이터 스티븐 리틀에게 보낸 질의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품작들을 이중섭과 박수근 진품으로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족보 불명’ 그림의 객관적 검증 절차는 왜 무시했는가. 윤범모 전 관장의 서면 감정서를 묵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질의서 핵심 가운데 하나는 박수근 유족의 요구다. 저작재산권자인 박수근연구소는 박수근의 것이라고 전시 중인 작품을 인정할 수 없고, 전문가들의 감정과 정확한 근거자료에 의해 진품 확인되기 전까지 전시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저작권자의 요청은 위력적이다. 가짜그림 공개 전시는 작고 작가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실질적으로 저작권자 동의를 얻지 못하면 도록 제작도 불가능하다.
남의 나라 전시에 중지하라 말할 권한은 없다. 심지어 가짜그림도 (사유)재산이라 제삼자가 간섭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한국미술에 관심 갖고 특별전을 계속 개최해온 라크마에서 위작 논란이 일어난 것은 유감스런 사태다. 이번 전시작 진위논란이 원만하게 해결돼 향후 한국미술 전시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한국의 보물들’ 전 출품작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질의서에 대한 라크마의 답변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아 몇 마디 적어보았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동국대 명예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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