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선대 지우기’, 위험한 도박인가 홀로서기인가

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2024. 4. 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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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독재자’의 딜레마, 갑작스런 과속 행보에 불만도 만만찮아

(시사저널=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김정은의 선대(先代) 지우기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자신이 거머쥔 절대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김일성·김정일을 주민들 뇌리 속에서 덜어내는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는 김정은 찬양이 대신 차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건 '태양절'이란 표현이 북한 관영 선전매체에서 사라진 대목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이자 북한 정권을 창출한 김일성을 상징하는 '태양'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마치 고대 이집트의 최고통치자인 파라오를 연상케 하던 이 말을 없앤 모양새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3주기인 1997년 그의 출생일을 '태양절'로 삼겠다면서 그동안 대대적으로 기념해 왔다. 그런데 올해부터 이를 '4·15' 또는 '4월 명절'로만 부르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해마다 거의 예외 없이 김일성 시신에 참배했지만 올해는 불참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금수산태양궁전(옛 금수산의사당)의 명칭에서도 '태양'을 뺄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월15일 조선인민군 항공육전병부대의 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월16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일성 상징하는 '태양' 표현 없앤 김정은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찬양 수위 조절도 눈길을 끈다. 김정일 생일을 지칭하는 '광명성절'이란 표현도 지난 2월 행사 때부터 모습을 감췄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을 상징하는 '선군(先軍)'이란 단어도 북한의 매체나 문헌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내부의 이런 기류를 두고 직접적으로는 김정은이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과도한 우상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은 2019년 3월초 열린 노동당 제2차 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는 "수령은 인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는 인식을 드러냈는데, 김일성·김정일을 태양으로까지 숭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지 정작 김정은의 깊은 속내는 따로 있을 것이란 분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집권 13년 차를 맞으면서 리더십을 공고화하고 4대 세습까지 염두에 둔 권력 기반을 다지려면 선대가 아닌 김정은 자신에게 온전히 힘이 실리는 틀을 다질 필요가 있다는 결심을 굳혔을 것이란 얘기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가업 승계 방식으로 이어지는 소위 재벌이나 대기업군에서도 사실 3~4대 오너가 창업자인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절대시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 않냐"며 "김정은도 결국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리더십을 갖추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련의 움직임이 홀로서기 차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김정일과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김정은의 의도가 정상국가로의 발돋움 차원이란 해석도 나온다. 대남관계나 중·러와의 외교 등에 머물렀던 선대와 달리 자신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 무대에서의 폭을 확장하고 있는 데 따른 내부 정비작업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배우자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던 김일성·김정일과 달리 자신의 배우자인 이설주를 '여사'로 등장시키면서 퍼스트레이디로 자리하게 한 것도 결국 북한을 기괴한 독재국가가 아닌 '정상국가'로 비춰지게 하려는 의도라는 진단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일련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선대 지우기 작업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이뤄지다 보니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고, 노동당 간부들이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미의 대북 압박에 대한 불만으로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가져가고 한국을 '제1 주적'으로 삼겠다는 김정은의 구상에는 후폭풍이 적지 않다. 지난 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의 이런 언급이 나오자 평양 3대헌장기념탑은 하루아침에 철거됐다. 

고위 탈북인사는 "김일성의 통일 관련 업적으로 찬양되던 상징물이 폭파 해체되는 광경을 지켜봤을 엘리트와 주민들은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일성 시대의 향수에 젖어있는 군부나 권력 내 원로그룹에서는 김정은의 조치에 대해 의구심이나 반감을 갖는 경우까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김정은 근접경호 늘어나

북한의 국가(國歌)는 가사와 곡은 우리와 다르지만 명칭은 '애국가'로 같다. 그런데 김정은은 여기에 등장하는 '삼천리'란 단어를 빼버렸고, 이어 아예 애국가란 표현을 지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로 바꿔 부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영토 조항이 있는데 왜 북한에는 없냐고 질책하는 바람에 이를 준비하느라 최고인민회의 개회까지 늦춰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는다면 김정은의 과속에 대한 경고 카드가 나올 수도 있다. 대북 정보 당국은 최근 들어 김정은의 공개 활동에서 신변경호가 부쩍 강화된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주택 건설현장 등 민생 분야뿐 아니라 노동당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 군사대학이나 군부대 등 권력을 떠받치는 핵심 시설을 방문하거나 관련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10명 안팎의 근접경호가 이뤄지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북한 정권의 핵심층 내부에서도 '최고지도자 위해 시도' 등이 나올 수 있다고 여길 만큼 김정은에 대한 불만 요인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귀띔했다.

세습정권의 굴레를 벗어나려 이미지 관리에 애쓰면서도 김정은 스스로 4대 세습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점은 딜레마일 수 있다. 핵과 미사일에 '올인'하면서 경제와 민생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체제 선전이나 우상화가 더욱 절실한 점도 문제다.

김정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27세 나이에 권좌에 올랐다. 제대로 된 후계수업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택한 건 할아버지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차용하는 것이었다.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고 제스처와 말투까지 판박이로 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낡은 옷을 벗어 던지겠다고 나선 셈이다. 어쩌면 김정은으로서는 당연하거나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선대가 남겨놓은 틀 속에 머물다가는 자칫 체제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란 점에서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체제의 명운을 건 김정은의 위험한 도박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와 국제 정세는 격랑 속으로 빠져드는 형국인 데다 남북관계마저 파탄에 이르렀다. 한국 내 일부 대북 우호세력까지 외톨이 신세로 만든 김정은의 결정에 볼멘소리도 나온다. 

특히 북한 내부에 태양절 폐지나 3대헌장기념탑 해체가 '김일성 용도폐기'로 비춰진다면 상황은 한층 더 심각해질 수 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탐닉하며 바깥세상에 눈뜬 청년세대뿐 아니라 원로그룹을 포함한 파워 엘리트와 주민이 김정은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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