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민희진! 그런데 좀 무섭다 [노원명 에세이]
‘어떤 미친 X이길래’ 하는 호기심에 3분짜리 기자회견 하이라이트를 유튜브로 보았다. 그다지 괴물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꽤 이쁜 여자가 화장도 안 하고 내 여자 형제들이 내게 말하듯 고성의 푸념을 하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흡인력이 느껴진다는 거다. 이번엔 20여분짜리 축약본으로 옮겨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기자회견이라기 보다는 퍼포먼스다. 나는 뉴진스와 르세라핌을 구분할 수는 없어도 뉴진스가 대단한 걸그룹이라는 것은 읽고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다만 뮤직비디오나 TV에 나오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민희진 기자회견은 내가 한 번도 못본 뉴진스 공연같았다. 20분짜리 축약 영상을 다 보고 나니 민희진이 좋아졌다.
텍스트로 읽었을 때 미쳤다고 생각했던 민희진이 직접 음성으로 들으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근사하다. 민희진 기자회견은 달라진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다루는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한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문명사적 기자회견’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을 ‘로고스 중심주의’로 명명했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음성 중심주의’와 같다. 태초에 음성(로고스)이 있었다. 따라서 음성이야말로 일차적이고, 진리의 기원이며, 또한 본질이다. 음성에 비해 글(텍스트)은 열등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글은 독이다”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음성을 글로 그대로 옮겨적으려 한들 불가능하다. 음성이 글로 변환되는 순간 변질과 왜곡이 일어난다. 글은 말을 소외시키고 화자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러나 음성은 한번 발화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것은 오직 글의 형태로서만 전파될 수 있다. 지난 수천년간 인류의 문명은 음성을 글로 전환해 전파하는 형태로 전개돼 왔다. 현대의 방송기술이 어느 정도 음성 그 자체의 보존과 전달을 가능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송은 편집의 결과물이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에서 보듯 편집된 음성은 성실한 텍스트보다 못하다.
민희진이 이런 변화된 미디어환경을 꿰뚫어 보고 그날의 퍼포먼스를 기획했다면 그녀는 천재적이다. 별 생각없이 그냥 내지른 것이라 해도 천재다. 천재는 원래 우연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재생되며 대중을 매혹하는 민희진의 음성이 과연 진실에 더 가까운가 하는 질문을 던질 차례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나는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지면에 옮기는 것이 훌륭한 기자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이지만 ‘음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연조가 쌓여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상대가 하는 말 대부분은 무의미한 소음이거나 그대로 옮겨적었을 때 진실의 독해를 방해하는 어질러진 소품들이다. 그런 소품들을 제 자리에 놓고 불필요한 것은 쓰레기통에 집어던져야 독자는 비로소 사실에 근접(오직 근접할 뿐이다)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런 점에서 음성 중심주의보다는 텍스트 중심주의에 가까운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텍스트라는 여과망을 거치지 않은 민희진의 음성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현상인지 생각하면 좀 무서워진다. 대중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번에 배웠을 것이다. ‘글보다 말이 우월하다’. 그들은 직접 말로 대중을 설득하려 든다. 문제는 그 말이 진실에 더 가깝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식에 둔감해진다. 텍스트로 ‘개저씨’와 ‘시XXX’를 읽고 상상했을 때 느껴졌던 당혹감이 유튜브에선 ‘비바 민희진’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진실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농락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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