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엔 ‘작은 유럽’이 있다···마닐라로 떠나는 시간여행
치욕의 순간도 역사다. 수백년 전 꿈틀댄 제국주의 망령은 아시아 전역을 집어삼켰다. 태평양의 진주로 불리는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국명조차 스페인 황제였던 펠리페 2세에서 따왔다. 필리핀은 ‘펠리페의 나라’라는 뜻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과거를 부정하는 대신 흉터를 끌어안고 자신만의 색으로 새살을 돋아내는 중이다. 거대한 용광로처럼 서구와 아시아의 문화를 녹여내며 동남아시아 허브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사실 필리핀을 찾는 많은 여행자가 ‘휴양’을 기대한다. 7000개가 넘는 섬을 품은 필리핀에 지상낙원으로 꼽히는 명소가 많아서다. 세계적인 보이그룹 BTS가 ‘서머패키지’ 화보집을 촬영한 곳도 필리핀 팔라완이다. 하지만 자연만 맛보고 간다면 필리핀의 ‘본캐’를 접하지 못하는 셈이다. 마닐라의 거대한 성벽 도시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자 필리핀 근현대사 속으로 시간여행이 펼쳐졌다.
성벽이 감싼 ‘작은 유럽’
성벽은 보호를 위한 구조물이다. 성벽 안의 사람과 터전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다. 하지만 마닐라의 성벽 목적은 다르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독점적으로 착취하려 만든 식민주의 산물이다. 필리핀 땅을 ‘발견’했다고 자부한 스페인 탐험가는 루손섬 마닐라 일대를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땅이라고 규정했다. 10세기부터 이어진 이 땅의 원주민과 주변국의 교류는 무시됐고, 중국 해적을 막는다며 거대한 성벽이 건설됐다. 높이 6m의 성벽은 사실상 스페인이 식민지 경쟁을 차단하기 위한 요새였다. 필리핀은 이후 380여년간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지로 상처의 역사를 살아냈다.
16세기 말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성벽의 두께는 2~2.5m, 길이는 총 4.5㎞다. 내부 면적은 67㏊에 달한다. 스페인은 이 성벽 안쪽을 ‘인트라무로스’라고 칭했다. 스페인어로 성벽(muros)의 내부(intra)를 뜻한다. 스페인 식민 정부의 주요 기관은 물론 종교, 교육, 주거 시설이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섰다. 성벽 안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스페인 건축물이 즐비해 ‘작은 유럽’으로도 불린다.
인트라무로스의 흥망성쇠는 식민통치와 운명을 같이했다. 스페인 점령 시기 이곳은 동남아시아의 무역벨트로 성장했다. 마닐라 갤리언 무역선은 정기적으로 마닐라와 멕시코 아카풀코를 오갔다. 동남아의 향료, 멕시코의 은, 중국의 도자기, 인도의 보석, 중동의 양탄자 등이 마닐라에서 교류됐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지역까지 연결하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성벽에는 8개의 문과 9개의 보루가 있었다. 지금도 성안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대포가 남아 있다. 미국 점령 시기를 거쳐 1941년 일본이 인트라무로스를 차지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에 휩싸였다. 3개의 문은 아예 사라졌고 성벽의 60%가 붕괴됐으며 도시 조직의 95%가 파괴됐다.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필리핀 정부는 식민시대 상징인 인트라무로스를 폐허로 남기는 대신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1951년 국가 사적지로 지정한 뒤 개발과 복원을 진행했다. 이제 시민들은 대포가 놓인 보루 위에 앉아 마닐라를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한다.
학문·종교 중심지···젊은 구도심
필리핀 사람들은 인트라무로스를 ‘올드 시티’라 불렀다. 구도심이라는 뜻과는 달리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자 젊음의 열기가 가득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채웠고, 젊은 연인들은 성곽에 앉아 데이트를 즐겼다. 인트라무로스가 마닐라의 학문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산토토마스대학교 캠퍼스도 1611년 이곳에 세워졌다. 지금도 마닐라 인트라무로스시립대학교를 비롯해 필리핀 명문대들과 마닐라를 대표하는 고등학교들이 올드 시티에 있다. 학생들은 성벽 안팎을 넘나들며 학문을 익히고 학창 시절의 추억을 쌓는다.
스페인은 가톨릭의 씨앗을 이곳에 뿌렸다. 인트라무로스 안에는 무려 8개의 성당이 세워졌다. 현재 필리핀 국민 83%가 가톨릭 신자다. 중앙 광장인 플라자 데 로마 앞에는 마닐라 대성당이 있다. 1571년 처음 지어졌지만 화재, 지진, 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됐다가 195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양쪽으로 과거 시청 건물과 옛 총독 관저가 위치했다. 함께 인트라무로스 산책에 나선 메리어트호텔 마케팅 디렉터 아치 니카시오는 “마닐라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려고 기다리는 커플들이 많다”면서 “인트라무로스 안에는 성당과 학교, 유적지와 맛집이 포진해 있어 시민들도 자주 찾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도 이곳에 있다. 1607년에 완공된 산 아구스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포격과 이후 대지진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기적의 교회’로 불린다. 스페인 황금시대를 그대로 재현해 웅장하고 화려하다.
유리 대신 조개를 끼워 만든 창문, 파인애플을 모티브로 한 바로크 양식의 강단, 그랜드 파이프 오르간, 16세기 십자가와 파리에서 온 거대한 샹들리에 세트 등 구석구석 볼거리도 많다. 교회 옆에 산 아구스틴 박물관에는 필리핀 가톨릭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마련돼 있다.
과거 상류층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카사 마닐라도 둘러보면 좋다. 식민시대 필리핀 상류층의 저택을 박물관으로 꾸몄다. 스페인 양식 건축물 내부는 침실, 거실, 서재, 파티룸 등으로 꾸며졌다.
필리핀 상류층들이 사용한 가구와 소품 등을 그대로 전시해 화려했던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부유한 삶을 누린 건 극히 일부였다. 대다수 민중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수탈당했다. 높은 세금, 강제노역, 강제개종 탓에 끊임없이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인트라무로스 인근에서 필리핀의 독립 정신도 만나볼 수 있다. 스페인의 압제를 폭로한 필리핀 국부 호세 리살을 기리는 리살 공원이 지척이다. 58만㎡ 면적에 울창한 야자수가 그늘을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다. 하지만 사실 이곳은 호세 리살이 1896년 스페인에 처참하게 처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영어교사이자 통역가인 파트리샤 그레이스는 “필리핀의 역사는 슬픔 그 자체였다”면서 “평화적인 민중운동을 펼친 호세 리살조차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신앙을 전해준 스페인의 통치 역사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아시아 국가면서도 영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을 마음에 품은 필리핀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면서 독특하다. “새벽 희미한 어둠 속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나의 피를 흩뿌려 어두운 새벽 더 밝히리라”는 호세 리살의 마지막 인사처럼 인트라무로스에서 시작된 불빛은 ‘동남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마닐라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알고 가세요
필리핀은 열대계절풍기후 지대로 우기와 건기의 차이가 크다. 보통 12월부터 5월까지인 건기에 좀 더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다. 필리핀이 한국보다 1시간 느리다. 화폐단위는 페소(PHP)로, 100페소는 2390원(4월 기준)이다. 종교는 가톨릭 83%, 개신교 9%, 이슬람교 5%로, 가톨릭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인천~마닐라 직항편을 타면 4시간20분 정도 소요된다. 현지 교통편은 공유차량 애플리케이션 그랩(Grab)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지프를 개조한 지프니를 타보는 것도 좋다. 마닐라의 역사와 문화, 관광 명소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순환버스 HOHO 버스를 타면 인트라무로스는 물론 마닐라의 강남으로 불리는 마카티, 공항이 있는 파사이 지역을 찾을 수 있다.
마닐라|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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