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피셜’ 정치 평론은 무엇을 남겼나
총선, 대선, 지방선거 등 굵직한 선거를 앞둔 날에는 이따금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 거 같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공적인 자리라면, 내가 정치비평가도 아니고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대답을 피하는 편이다. 사적인 자리라면 질문한 사람이 내 정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나는 최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려 하는 편이다. 즉,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여론 추이에 상관없이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거라는 희망 섞인 예측을 한다.
냉철한 분석 대신 기우제 지내는 평론가들
그리고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낙관적으로 혹은 희망적으로 예상했다가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보다, 비관적 혹은 냉소적으로 예상했다가 ‘좋게’ 나왔을 때 아무래도 민망함과 멋쩍음은 곱절로 크기 마련이다. 전자의 경우처럼 희망이나 절박함을 안고 있다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하면 함께 아쉬워하고 서로 위로할 수가 있다. 반면 후자처럼 혼자 헛된 희망에 젖지 않는 냉철한 사람인 양 굴다가 예측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면, 비웃음거리가 되고 조롱받기 일쑤다.
냉철한 분석가인 척하다 망신당한 사람은 아주 잠깐의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더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이 해프닝으로 끝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일을 못해서, 그 ‘좋은 결과’의 의미를 고집스럽게 폄하하고 냉소하다 끝내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향하고 설파한 정치적 가치관을 전부 망각해버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른바 논객, 정치비평가를 참칭하는 사람들이다.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어느 모로 봐도 집권 여당이 패배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과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여당의 단독 과반의석을 예측한 비평가, 분석가들이 있었다. 이들에겐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완전히 방기한 무근거한 억측, 그로 인한 여론 왜곡과 선거 담론이 혼탁해진 상황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들 역시 각자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따라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고 마치 기우제 지내듯 ‘우리가 이긴다’라고 반복하며 논평을 가장한 주문 외기를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특히 시종일관 여당의 과반의석 압승을 예언한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이 완벽하게 정반대 결과가 나온 총선 이튿날 시사 유튜브 펜앤드마이크티브이(TV)에 출연해 “제 정성이 하늘에 닿지 못해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직업윤리를 심하게 손상하는 일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 아니 좋게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다. 얼마 전까지 야당에서 활동하고 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하고 진보의 재집권을 위한 전략 구상을 책으로 펴낸 이력을 등에 업은 채, 본인이 몸담았던 당의 압도적 실패와 패배를 마치 저주를 퍼붓듯 주야장천 예언했던 사람,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이다. 야당, 즉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것에 자신의 명줄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냉소와 비관을 넘어 사실상 야당 패배가 당위인 듯 논평을 쏟아냈다. 여기저기 인터뷰와 방송 출연을 통해 제18대 총선과 비교하며 110석도 위태롭다고 전망했다. 근거는 전혀 없었다. 2024년 3월 초까지 그러다가도 3월 말 들면서는 여론 추이가 도저히 안 맞겠다 싶었는지 아주 갑작스럽게 새로운 변수로 인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면서 국회 의석 수십 석을 횡단해 예측을 수정했다.
근거 없는 정치 분석이 담론을 흐린다
그는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사자성어 비명횡사라는 말을 살려서 ‘비명 성향 의원은 내쳐진다’라는 의미로 썼다. 거기에 ‘친명 성향이면 뜻밖의 행운을 얻는다’는 상황을 라임을 살려 친명횡재라고 표현한 것은 나름의 소구력이 있었다. 야당의 이른바 ‘사천 논란’을 비판하는 건 비평가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여론 변동을 분석하고 의석수를 예측한다면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지는 밝혀야 한다. 그는 끝내 그러지 않고 선거 담론을 오염시키는 데만 일조했다.
나는 <프로보커터>라는 책에서 음모론이나 상대 진영을 ‘긁는’ 폭언과 막말,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개소리’를 꾸준히 송출함으로써 주목도를 높이고 그것을 자본으로 일말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유형의 논객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서 한 가지 유형을 추가하자면 최병천의 경우처럼 아무 근거 없이 분석과 예측을 참칭하며 반증의 순간은 영원히 뒤로 미루는, 분위기와 시류를 완전히 거스르는 얼토당토않은 예언으로 이목을 끄는 유형이 있겠다. 실제로 최병천은 여론을 왜곡하고 담론을 혼탁하게만 만들었음에도 정치비평가로서 다시는 없을 전성기를 누렸다. 결정적으로 그가 야당 싱크탱크 부원장 출신이라는 이력이 많은 언론의 이목을 끈 요인이었다. ‘야당 인사도 야당을 비판한다’는 구도는 언론이 이용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다. 다만 선거를 앞두고 매우 선정적이고 무근거한 억측을 지나치게 많이 쏟아낸 탓에 그는 논객으로서의 유통기한을 스스로 단축해버렸다.
‘냉철한 분석가’이자 ‘논객’의 이름값을 너무 빨리 소진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개중 최악의 선택지는,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던 예측과 완전히 반대로 나온 결과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집요하게 폄하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종국에는 여태껏 설파했던 신념과 가치관을 전부 스스로 배반하기까지 하면서 알량한 자존심이나마 지키려 하지만 그나마도 날아가버리고 억지와 악만 남는다. 이러다 총선 다 망하게 생겼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우는소리 내던 자들의 종착역이 어디일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냉소주의에 빠진 정치평론가의 끝은
살짝 다르면서 비슷한 얘기로 넘어가보겠다. 어떤 사람이 일을 굉장히 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생각 외로 너무 못할 때 느끼는 실망감이 있고, 어떤 사람이 일을 형편없이 못하리라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매우 잘할 때 느끼는 놀라움이 있다고 하자. 두 경우 모두 나의 ‘사람 보는 눈’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지만, 적어도 후자 같은 ‘서프라이즈’에는 일말의 유쾌함이 따를 수 있다. 즉, 기분 좋은 놀라움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전자보다 후자에 나의 오류를 인정하기가 훨씬 쉬운 게 당연하다.
그런데 정치비평 영역에서는 종종 정반대의 경향이 목격된다. 가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제19대 대선을 앞두고 <중앙일보>에 게재된 ‘한 달 뒤 대한민국’이라는 칼럼과 같이, 본인이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혹여 일을 잘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실망할 태세로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행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건 차치하고 내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일부 진보 성향 논자들이 민주당 세력의 승리에 대해 취하는 냉담하고 미심쩍어하는 태도다.
예컨대 민주당 세력에서 어떤 사람이 대선이나 총선에서 승리했다고 했을 때 ‘저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다’ 혹은 ‘진보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라고 공언하고 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이었는지 만천하에 드러나도, 아무리 진보적인 정책과 법안을 관철한다 해도 진보 성향 논자의 시선에서 그 사람은 영원히 무능하고 반노동적 정치인으로 남아야 한다. 논자는 집요하게 그 정치인의 ‘잘한 일’을 과소평가하고 평가절하하고 냉소하고 끝내는 저주하다 결국 직전까지 그 자신이 지향하고 설파했던 가치와 신념을 전부 망각하고 배반하고 돌아서버린다. 민주당보다 더 선명한 진보를 추구하는 논자들 가운데 민주당의 압승, 특히 조국혁신당의 돌풍을 두고 염려와 의구심을 표하는 것을 넘어 유난스럽게 혐오감과 공포감마저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 상상이 된다.
제22대 총선 결과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표하면서 녹색정의당이 원외 정당이 됐다는 이유로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사라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을 진보세력으로 보지 않는 것은 어떻게든 이해하겠지만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독립연구자 박권일은 <한겨레>에 게재한 ‘‘300 대 0’의 의미’라는 글에서 진보당 등은 보수 기득권이 주도한 위성정당에 붙었기 때문에 진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게 궁색한 이야기를 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참여하는 세력은 죄다 진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원한 감정이 이번 총선을 주도했다고 논평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일단 내 이해관계와 가치관은 잠시 접어두고, 썩 내키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 거대한 퇴행을 몰고 오는 세력을 견제하고 축출하기 위해 그것을 잘해낼 것으로 보이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합리적 계산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렇듯 선명한 진보를 표방한답시고 유권자를 탓하고, 자기 진단이 옳았음을 고수하기 위해 백 보 전진이 아니면 모두 소용없다며 일 보 전진에 훼방만 놓는 자들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유권자 탓하고 ‘정치 혐오’ 조장하는 평론계 재편해야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떨치다 지금은 억지와 악만 남은 진중권 교수는 이젠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여겼는지 총선 뒤 티브이(TV)조선 <강적들>에서 “총선 전이나 총선 후나 여러분의 삶은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선거 결과가 가지는 의미를 폄훼하다 못해 선거 자체의 가치마저 부정하며 정치 무관심과 정치 혐오를 부추긴 것이다. 사실상 정치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치비평가로서 무슨 기능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선거를 필두로 정치권의 본격적인 재편을 요구할 수 있듯 평론계에도 대대적 재편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 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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