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연령 유럽파’라는 한국 축구의 딜레마 [경기장의 안과 밖]

배진경 2024. 4. 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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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유럽파 선수들이 늘고 있다. 도전을 이어가려면 대표팀에서 성과를 내 병역을 해결해야 하는데, 소속 팀은 이들의 차출을 꺼린다. 한국 축구의 새로운 딜레마다.
U-23 축구 대표팀의 황선홍 감독과 선수들이 4월5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아랍에미리트로 출국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축구에서 ‘유럽파’라는 타이틀은 성공한 선수와 동의어로 통했다. 축구의 본류인 유럽에서 뛰는 선수가 되는 것이 태극마크를 다는 일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실제 1990년대 전까지 유럽 무대를 장기간 누빈 한국 선수는 차범근이 유일했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최정상급 공격수로 우뚝 섰다.

2002 한·일 월드컵의 대성공으로 한국 축구의 가능성이 확장했고, 젊은 선수들에 대한 유럽 축구계의 관심도 커졌다. 박지성·이영표·송종국·이천수·차두리·김남일 등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차범근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박지성과 이영표였다. 기본적인 기량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 등 현지 적응력이 어우러져야 생존이 가능했다. 둘의 연착륙을 도운 이는 거스 히딩크다. 히딩크 감독과 함께 유럽 생활을 시작한 덕분에 두 선수는 생존을 넘어 ‘롱런’할 수 있었다.

2010년대 들어 이청용·기성용·구자철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모두 K리그에서 10대에 데뷔해 국가대표팀에서도 빠르게 주전으로 올라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소속 팀에 꽤 높은 이적료를 안겨주고 유럽으로 떠났다. 한편으로 대한축구협회(KFA)의 유학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는 사례도 나왔다. 16~17세의 어린 선수들을 6개월간 유럽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대표 격 인물이 손흥민이다. 2008년 KFA 유학 6기생으로 함부르크 SV 유스팀에 속한 손흥민은 2010년 11월, 4년짜리 정식 1군 계약을 맺었다. 한국 국적의 EPL 득점왕이 탄생하게 되는 전설의 출발점이다.

2024년 현재 한국 축구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우선 국제 대회 성과가 누적됐다. 이제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꾸준히 노릴 수 있다. 또 유럽 무대를 누빈 선수들이 크고 작은 성공을 이어왔다. 토트넘의 손흥민 외에도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이 유럽의 슈퍼 클럽에서 각각 그 재능으로 인정받고 있다. 축구협회 차원의 지원이나 상업적 성공이라는 미끼 없이 순수하게 선수의 기량만으로 유럽 팀들이 매력을 느끼는 분위기다.

과거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던 유럽 스카우트들은 이제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수준급의 기술을 갖춘 데다, 개인보다 팀을 우선으로 하는 헌신적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이적료 등 선수 영입에 드는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유럽 스카우트들은 아시아(특히 한국과 일본) 선수들을 ‘긁지 않은 복권’으로 인식한다. 유럽 유수의 에이전시가 국내 에이전시와 파트너십을 맺는 중이다. 국내 유망주들도 일찌감치 유럽 진출을 목표로 피지컬 트레이닝을 병행하고 영어 공부도 하는 분위기다. 유럽 입성을 넘어 손흥민의 뒤를 잇는 족적을 남기는 게 그들의 목표다.

2023년 말 기준으로 유럽파는 40명을 넘었다. 특히 고교 졸업을 전후해 유럽으로 직행하는 선수의 비중이 높아졌다.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지 않아도 잠재력 하나만으로 인정을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우영·홍현석·김용학·이현주·조진호 등이 그런 사례다. K리그에서 데뷔해 유럽으로 가는 선수들의 연령대도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으로 낮아졌다. 오현규·권혁규·고영준(2001년생), 양현준·이한범(2002년생), 배준호(2003년생)가 지난 1년 사이 이적료를 받고 유럽 무대로 나아갔다. 한국 축구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상은 새로운 딜레마를 동시에 안긴다. 젊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도전을 이어가려면 병역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럽의 소속 팀은 기량이 좋은 한국 선수들의 국가대표팀 차출을 꺼린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23세 이하(U-23) 선수들이 참가하는 연령별 대회이고, 이 대회는 A매치로 인정되지 않는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대표팀 차출을 보장하는 경기는 A매치뿐이다. 소속 팀에서 선수를 보내줘야 할 ‘의무’가 없다.

징병제로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한국에서 스포츠 선수들은 국제 무대의 성과를 통해 병역 혜택을 받는다. 올림픽 동메달 이상 혹은 아시안게임 금메달 성과를 내는 경우 예술체육요원으로 복무를 대체할 수 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손흥민의 경우 만 26세이던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가까스로 병역 이슈를 해결했다. 만약 그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거나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다음 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만 28세까지 병역을 해결하지 못한 선수는 국내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U-23 축구 대표팀의 황선홍 감독 ⓒ연합뉴스

핵심 선수 없이 올림픽 예선 치를 수도

손흥민과 대비되는 사례는 권창훈이다. 1994년생인 권창훈은 차범근·박주영·손흥민에 이어 네 번째로 유럽 5대 리그에서 단일 시즌 10골 이상을 기록했다. 프랑스 리그1을 거쳐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아시안게임 참가가 불발되면서 병역 문제가 꼬였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는 U-23 선수로, 2021년 도쿄 올림픽에는 와일드카드로 나섰다. 하지만 올림픽 메달 획득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비해 까다로웠고, 결국 2021년 5월 국내로 돌아와 상무에 입단하여 병역을 마쳤다.

당장 4월15일 카타르에서 개막하는 U-23 아시안컵에 주축 선수들이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 전력의 핵심인 양현준(셀틱)과 김지수(브렌트퍼드)가 소속 팀의 차출 거부로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다. 당초 두 팀은 선수를 보내겠다는 데 합의했지만 돌연 입장을 바꿨다. FIFA가 차출 의무를 보장하지 않는 대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번복이었다. 대회 개막을 닷새 남겨둔 가운데 배준호의 차출도 확정되지 않았다. 배준호는 소속 팀 스토크시티의 에이스로 활약 중이다. 배준호가 한 달가량 빠질 경우 스토크시티는 잉글랜드 2부 리그(챔피언십)에서 3부 리그로 떨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강등 위기에 처한 팀은 에이스를 보내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정상빈도 소속 팀 미네소타를 간신히 설득해 대회 직전 대표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U-23 아시안컵은 7월에 열릴 파리 올림픽 최종 예선을 겸하고 있다. 3위 이상이면 올림픽 본선으로 직행한다. 4위가 되면 아프리카의 기니와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한다. U-23 대표팀을 이끄는 황선홍 감독은 3위 이상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별 리그부터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만난다. 일본·중국·아랍에미리트와 차례로 맞붙는다. 황선홍 감독이 “조별 리그부터 전력 모드로 가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다. 황선홍 감독은 지난 2월부터 선수들의 차출을 위해 직접 구단을 찾아 관계자와 면담을 갖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각 팀의 사정과 차출 규정 부재로 인해 핵심 선수 없이 대회를 치를 상황에 놓였다.

한 축구협회 관계자는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 뛰는 어린 선수들의 비중이 늘어날수록 향후 연령별 대표팀 운영에도 점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기량을 갖춘 ‘저연령 유럽파’가 늘면서 전에 없던 한국 축구의 고민이 시작됐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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