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은 봄꽃처럼 아름답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2024. 4. 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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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맞선 페미니스트〉
이임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한성원 그림

봄 맞은 산에 오른다. 가쁜 숨이 닿는 곳마다 보랏빛 꽃들이 피었다. 제비꽃이다. 톡톡 벌어진 꽃송이가 밥 달라 조르는 새끼 제비들의 앙증맞은 입을 닮았다. 이래서 제비꽃인가 했더니 제비 올 때 핀대서 제비꽃이란다. 어쨌거나 작지만 어엿한 봄, 생명의 전령사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조동진의 ‘제비꽃’이 인기를 끌 때 나는 그 노래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라니, 우습다고 생각했다.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대학 교정을 산책하다 우연히 푯말이 달린 나무 아래 섰을 때, 잊힌 노래가 떠올랐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벗들을 기리며 나무를 심었다는 글귀 밑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학교를 떠나 공장에서 농촌에서 꿈을 일구다 요절한 이들의 이름. 그 이름들이 오래된 노래를 불렀다.

“내가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너는 조금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조동진은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 부슈먼과 앙드레 슈발츠-바르트의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에 나오는 혼혈 노예 솔리튜드(고독)를 떠올리며 이 노래를 썼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과 맞서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투쟁을 벌이는 두 여주인공에게서 상당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라면서. 그들의 어떤 점이 이 섬세한 음유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안정효 옮김)의 솔리튜드는 19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과들루프섬에서 노예제에 맞서 싸우다 사형당한 실존 인물로 2020년 파리시가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을 헌정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소설 맨 앞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1802년 아이를 낳자마자 처형되었다니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알 것 같다. 니나는 작가 루이제 린저가 창조한 인물이다. 작가는 1950년 발표한 소설 〈삶의 한가운데〉(박찬일 옮김, 민음사)에서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라는 자신의 철학을 니나로 형상화했다. 니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자기 자신에게 극단을 요구”한 인물이었고, 전후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 뜨거운 삶에 열렬히 호응했다. 목숨을 걸고 나치에 저항하고 인습을 넘어 자신의 사랑을 한 니나에게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본 것이리라.

산등성이에 서자 바람이 땀을 식힌다. 정상은 내 목표가 아니다. 한 무리의 등산객을 등지고 아래 샛길로 걸음을 옮긴다. 저만치 미루나무가 떨고 있는 형무소의 붉은 담이 보인다.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던 이들을 가두었던 제국의 감옥. 그들의 마지막을 조문했던 사형장 앞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이 땅의 제비꽃들을 떠올린다. 너무 오래 우리의 시야에서 잊혔던 이름들을 생각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이들이 만든 역사

역사학자 이임하는 몇 해 전부터 꾸준히 그 이름들을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다. 〈조선의 페미니스트〉(철수와영희, 2019)에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여성 일곱 명을 조명했던 그가 또 다른 일곱 명의 삶을 복원한 〈일제에 맞선 페미니스트〉를 펴냈다. 전작에 소개된 유영준, 정종명, 정칠성, 고명자, 허균, 박진홍, 이순금은 이름이라도 알았지만 이번 책에 나오는 우봉운, 김명시, 조원숙, 강정희, 이경희, 이계순, 이경선은 태반이 낯설다. 저자 자신도 생소한 이름이었다고 고백한 이들의 삶을 조명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슷한 작업을 해본 터라 짐작이 간다. 그 힘든 일을 해준 저자에게 고마워서라도 읽지 않을 수 없다.

목차를 보니 일곱 명 중 감옥에서 죽은 김명시를 뺀 여섯 명의 사망 연월일이 미상이다. 죽은 날을 알 수 없는, 굴곡 많고 고단하고 어쩌면 억울했을 인생을 살았던 이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충만해서 섣부른 동정을 불허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북간도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와 불교계를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돌봄운동을 했던 우봉운, 국제적인 반제 운동을 펼친 ‘백마 탄 장군’ 김명시,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홀로 조선에 와서 활동하며 수차례 감옥살이에도 굴하지 않았던 강정희, 뜻 맞는 남편과 함께 사회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가족 형태를 고민한 이경희….

출신도 이력도 성격도 다르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 제국에 맞서 싸웠고 자신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며 다른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 과정에서 단단한 투지뿐 아니라 유연한 사고방식을 보여주었으니, 오늘날의 공유주택과 유사한 독신 여성 아파트를 만든 게 대표적인 예다. 직업에 대한 열린 사고도 이들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강정희는, 직업은 신성하다며 웃음을 파는 여급은 직업인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에게 “자본가의 직업은 얼마나 신성하냐?” 되묻는다. 그 자신이 먹고살고 공부하기 위해 외국어 교사, 간호사, 세탁부로 일했고 운전수가 되려 자동차연구소에 입학하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귀천과 평판을 따지지 않고 일하며 경제적 독립을 꾀한 그의 투지는 봄꽃을 닮았다.

책을 읽으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이들이 만든 역사가 봄날 햇살처럼 따스하고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으나 꿈꾸는 사람은 언 땅을 뚫고 핀 봄꽃처럼 아름답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었던 사람들 덕분에 이 봄이 아름답다는 것도.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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