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스라엘 ‘약속겨루기’ 뒤 가자에 또 다른 지옥문이 열린다

정인환 기자 2024. 4. 2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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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자의 참극]확전 원치 않는 두 나라 대응에 한시름 던 이란-이스라엘 전쟁 위기… 가자는 다시 격화 조짐
2024년 4월21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져내린 건물 앞에 두 어린이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REUTERS

이스라엘이 시리아 주재 자국 영사관을 공습하자, 이란이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공격을 벌였다. 이란의 보복에 이스라엘은 재보복에 나섰다. 이스라엘도, 이란도 상대방의 보복으로 입은 피해는 거의 없다. 양쪽 모두 보복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관련국과 공유했다. 보복을 주고받은 뒤엔 양쪽 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추가 행동에 나서지 않을 뜻임을 분명히 했다. 기이한 ‘약속겨루기’다.

보복 공격 전 주변국과 미리 소통

2024년 4월1일 오후(현지시각)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주재 총영사관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져내린 뒤 이란 쪽은 보복을 다짐했다. 주권 침해와 다름없는 외교공관 공격으로 군 수뇌부 등 7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이란은 4월13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무인기(170대)·순항미사일(30발)·탄도미사일(120발)을 무더기로 이스라엘을 향해 쏘아 올렸다. 4월14일 튀르키예·요르단·카타르·이라크 등 주변국 외교당국은 “이란 쪽이 사전에 공격 계획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교장관도 “주변국과 이스라엘의 동맹인 미국 쪽에 공격 72시간 전에 미리 계획을 알렸다”고 말했다.

미국 쪽은 “이란의 사전 통보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외교부 쪽은 “중재자 입장에서 보복공격 전에 미국·이란 쪽과 소통했고, 관련 사실도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란 쪽이 외교채널을 통한 ‘간접 전달’ 방식을 택했다는 얘기다. 사전 통보를 받은 요르단은 보복공격 당시 미국 등과 함께 이란 쪽 발사체에 대한 요격작전에 동참했다. 미국도, 이스라엘도 사전에 이란의 공격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에 딸린 <타스님> 통신은 4월18일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항공우주군 사령관의 말을 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에는 구형 무기만 사용했다. 최소한의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과 서방이 무기체계를 최대한 사용하도록 압박한 것”이라고 전했다. 신형 미사일과 첨단 무인기를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파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터다.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자국 영토를 겨냥한 공격이 이뤄진 만큼 이스라엘도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스라엘 역시 확전은 원치 않았다. 미국도 이란에 대한 보복대응에 “절대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하게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 ‘모종의 딜’로 추정되는 움직임은 따로 있었다. “익명의 이집트 당국자가 카타르 매체 <알아라비 알자디드>에 이스라엘이 추진해온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작전을 미국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란의 전례 없는 미사일·무인기 공격에 맞서 대규모 보복 타격을 하지 않는 게 조건이었다.” 일간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은 4월18일 이렇게 보도했다. 이어 신문은 “미국은 즉각 관련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이집트 쪽은 이스라엘의 라파 진입작전으로 인한 후폭풍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라파 진입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

이스라엘 쪽은 라파에 주둔한 하마스 병력이 적어도 4개 대대 규모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하마스 지도부가 사로잡은 이스라엘 인질과 함께 라파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전면적인 승리를 위해선 라파 진입작전이 불가피하다”고 거듭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가자지구 북부와 중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란하면서, 라파에만 피란민이 약 120만 명 몰려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군이 탱크를 앞세워 지상군을 라파로 진입시킬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인명피해 규모는 가늠조차 쉽지 않다. 미국 쪽이 그간 라파 진입작전에 강하게 반대해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스라엘의 보복공격 사흘 뒤인 2024년 4월22일 이란 중부 이스파한 외곽의 국제공항에 인접한 미사일 방어기지의 모습을 촬영한 위성사진. AP 연합뉴스

4월19일 새벽 이란 중부 이스파한 외곽에서 폭음과 섬광이 감지됐다. 이스라엘군이 예고한 맞대응에 나선 게다. 한때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고대도시 이스파한은 소형 원자로 3기와 핵기술센터 등이 자리한 이란 핵개발 프로그램의 심장부로 통한다. 우라늄 농축시설이 들어선 나탄즈는 이스파한에서 불과 100㎞ 남짓 떨어져 있다. 이스라엘이 이스파한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국제 유가는 급등했고, 주요국 주가는 폭락했다.

정작 이란 쪽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아미르압돌라히안 외교장관은 공격 당일 미국 <엔비시>(N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 장난감 같은 소형 무인기가 날아다녔을 뿐”이라고 말했다. <프레스티브이> 등 이란 관영매체는 “요격 시스템이 가동됐고,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란의 보복공격 때 이스라엘이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이란 쪽은 “추가 보복대응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도 밝혔다. 다만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4월23일 파키스탄 라호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또다시 이란 영토를 공격하는 오판을 한다면,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이스라엘 정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한 발씩 물러서면서, 전쟁 위기로 치닫던 중동 정세는 일단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양쪽이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상대방에게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정세는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 핵심 변수는 다시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다. 세 가지를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4월18일 회의를 열어 ‘옵서버’ 자격으로 유엔에 진출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회원국 가입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영국과 스위스가 기권했다.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로버트 우드 주유엔 미국 차석대사는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쪽에 국가 수립을 위해 필요한 개혁 조처를 하라고 오랜 기간 요구해왔다. 하지만 테러조직인 하마스가 여전히 가자지구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중동 정세의 핵심 변수

둘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200일째인 4월23일 미국 상원은 우크라이나와 대만,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950억달러 규모의 지원안을 압도적(찬성 79표 대 반대 18표)으로 통과시켰다. 이스라엘 몫은 전시 지원금 170억달러와 가자지구(약 20억달러)를 포함한 기타 전쟁지역 인도지원용 예산 90억달러 등 260억달러에 이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튿날 오전 일찌감치 지원안에 서명했다.

셋째, 침공 200일째를 맞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자료를 내어 최근 가자지구에서 어린이와 여성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4월19일 라파 탈알술탄 지역의 주거용 건물이 폭격을 당해 어린이 6명과 여성 2명을 포함해 9명이 목숨을 잃었다. 4월20일엔 라파 동부 타누르 지역에서 인접한 가옥 2채에 폭격이 가해져 어린이 15명과 여성 5명 등 20명이 숨졌다. 같은 날 라파 샤보라 지역에서 벌어진 공습으로 어린이와 임신한 여성 등 4명이 목숨을 잃었다.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10분마다 가자지구에서 어린이 1명이 죽거나 다친다. 전쟁법과 교전수칙에 따라 보호받아야 할 대상임에도 (어린이와 여성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민방위 요원들이 2024년 4월24일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나세르병원 주변에서 암매장된 주검을 수습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특히 튀르크 대표는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나세르병원과 북부 가자시티의 알시파병원의 파괴된 모습과 두 병원 인근에서 대규모 암매장지가 발견됐다는 점에 경악했다”고 말했다. 나세르병원 인근 암매장지에선 4월20일부터 24일까지 주검 310여 구가 발굴됐다. 일부 주검은 발가벗은 상태로 손발이 묶인 채였다. 이스라엘군이 3월 중순부터 2주간 봉쇄작전을 벌인 뒤 물러간 알시파병원 인근에서도 4월 초부터 암매장된 주검 380여 구가 발굴된 바 있다. 튀르크 대표는 “발견된 주검에 대한 독립적이고 투명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다국적 요원이 조사에 참여해야 한다. 의료시설은 국제 인도주의 법에 따라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민간인과 구금자, 기타 전투 능력을 상실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전쟁범죄”라고 말했다.

이어 튀르크 대표는 이스라엘군이 라파 진입작전을 벌여선 안 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라파 진입작전은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을 추가로 위반하는 행위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고, 피란민이 대규모로 대피해야 할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추가적인 전쟁범죄 발생 가능성도 크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면 관련 당사자들은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4월25일 펴낸 최신 자료에서 2023년 10월7일부터 전쟁 201일째를 맞은 4월24일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어린이 1만4600여 명과 여성 9600여 명을 포함한 가자지구 주민 34262명이 숨졌다고 집계했다. 부상자는 7만7229명에 이르며, 사망한 채 건물 더미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자도 7천여 명이나 된다.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는 최근 “개전 이후 지금까지 가자지구에 쌓인 무너진 건물 잔해만도 약 2300만t에 이르며, 불발탄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를 치우는 데만 여러 해가 걸릴 것”이라고 짚었다.

이스라엘군의 ‘라파 공격 임박’ 관측

이스라엘 쪽은 곧 지상군을 라파로 투입할 기세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4월22일 “이스라엘군이 라파 민간인 대피 계획을 마련 중이다. 지상군 작전은 약 6주간 이어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에이피>(AP)는 4월24일 위성사진 분석을 토대로 “최근 이스라엘의 공세가 집중된 칸유니스 인근에 대형 텐트촌이 새로 건설됐다”고 전했다. 같은 날 <로이터> 통신은 이스라엘군 고위 당국자의 말을 따 “라파 진입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면 즉각 지상군 투입 작전을 개시할 수 있다”고 전했다. ‘지옥문’이 하나 더 열리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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