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 팔다 타이어 만들더니, 권력 정점에?”…극우 세력은 싫어한다는 ‘이 회사’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4. 4. 2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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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52][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44]이시바시 쇼지로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극우세력이 끔찍이 싫어하는 이 기업
일본 극우세력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 기업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싫어하는 일본기업이라니 흥미로운데요. 그 기업은 바로 세계적인 타이어 제조사 브리지스톤(Bridge Stone)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의 이름이 그렇다면 브리지스톤이냐? 그건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은 ‘이시바시 쇼지로’인데요. 그의 이름 이시바시(石橋)의 뜻을 풀어보면 돌다리, 즉 ‘stone bridge’이기 때문입니다.
이시바시 쇼지로 브리지스톤 창업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그렇다면 회사이름이 왜 스톤브리지가 아니고 브리지스톤이냐는 의문이 드실 텐데요. 여기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왕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영어로 사명을 짓는 김에 좀더 발음이 편하고 쉬운 브리지스톤이 낫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고요.

또 당시 미국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던 경쟁 타이어회사 파이어스톤이란 회사가 유명했기에 이를 의식해 스톤을 뒤로 보냈단 이야기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당시 추격자 신세였던 브리지스톤은 향후 이 파이어스톤이란 회사를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이름 하나 잘 짓는 것도 기업엔 정말로 중요한 일인 셈이죠.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사진 제공=김호영 기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일본의 극우세력은 브리지스톤을 싫어하는 걸까요. 바로 이시바시 쇼지로의 외손자가 바로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인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총리 재임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유관순 열사가 수감된 감방에 헌화한 뒤 추모비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며 뉴스의 중심에 선 바가 있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이처럼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동아시아 평화를 강조하는 행보로 인해 일본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감자임을 자청했던 그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브리지스톤의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인 탓에 일본 내부에서도 반감이 큰 사람들이 많은 것이죠.

가업을 포기한 차남, 혁신을 택하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브리지스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그 창업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시바시는 1889년 2월 1일 일본 후쿠오카 현 쿠루메 시에서 이시바시 도쿠지로의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모노를 만드는 원단을 팔고 이러한 원단을 재단하고 재봉하는 가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0대 시절 쿠루메 상업학교를 졸업했던 이시바시는 당시 병으로 요양 중이던 아버지를 대신해 형과 함께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형은 전쟁으로 인해 징병됐고 어린 이시바시 혼자서 가업을 책임져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시바시 쇼지로 브리지스톤 창업자
손기술이 상당히 필요한데다 다양하고 복잡한 주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그는 과감하게 선택과 집중을 택합니다.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 한 가지에 집중하자며 ‘버선’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그는 단순화된 사업 아이템인 버선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1908년 새로 공장을 짓고 봉제용 재봉틀과 재단기,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기 위한 석유 발동기를 도입합니다.

또한 도제식으로 내려왔던 사업 방식을 벗어던지고 단순 작업을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월급제 노동자를 대거 고용합니다. 현대식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한 그는 경영 방식도 근대화해 버선 사이즈마다 달랐던 판매가격을 통일시켰고 1912년 큐슈 지역 최초로 자동차를 사 자신이 판매하는 버선 광고판을 부착해 마을을 돌아다니는 등 광고와 마케팅 수완도 발휘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14년, 그의 회사는 대기업과 어깨를 같이할 정도로 성장하며 그에게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줬습니다. 특히 그는 전쟁 직전 물가 상승과 공급난 등을 예견해 일찌감치 직물과 실 등 원료를 대량으로 구입해 오히려 전시 상황에서 더 많은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내친김에 1918년 회사 이름을 일본 버선 주식회사로 바꾸며 일본을 대표하는 버선 생산기업으로 발돋움하며 일본 4대 버선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손기정이 신었던 버선신발, 회사 미래를 바꾸다
다들 버선을 신어보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버선은 미끄러운 바닥으로 인해 쉽게 넘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이러한 버선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신발용으로도 쓸 수 있는 고무바닥 버선인 지카다비가 있습니다. 과거 막노동을 하거나 흙바닥에서 일할 때 일본인들은 의례 지카다비를 신곤 했습니다. 또한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가 당시 신었던 신발 역시 바닥이 고무로 된 지카다비였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착용했던 자카다비 모델. [사진 제공=손기정기념관]
버선 제조사를 운영했던 이시바시는 이처럼 지카다비를 생산하며 바닥이 잘 떨어지는 고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결과 고무에 대해서는 달인의 경지에 오를 정도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개발로 얻은 기술 경쟁력은 회사의 주사업을 버선에서 타이어로 옮겨가는 결정적 힘이 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발에 씌우는 버선을 만들던 회사가 사람의 다리를 대신하는 자동차 바퀴를 감싸는 타이어를 만드는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죠.
초창기 브리지스톤 타이어 공장
고무의 달인이 되어가던 20세기 초, 전 세계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고 이와 더불어 전쟁에 쓰일 자동차와 탱크, 전투기 등 각종 탈 것이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시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쟁을 계기로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동차 산업의 성장은 자연스레 타이어 시장의 성장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를 두눈으로 목격하고 기회를 포착한 이시바시는 고무 기술 노하우를 활용해 1931년 브리지스톤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타이어 시장 진출을 선언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을 과감하게 혁신시킨 것처럼, 본인이 직접 키워낸 버선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타이어라는 새로운 산업에 도전한 셈이죠.
전세계로 뻗어나간 돌다리 타이어
물론 자동차가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미국을 중심으로 던롭, 미쉐린 등 세계적인 타이어 브랜드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시장인 만큼 초창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버선 사업을 통해 이미 습득한 대량 생산의 노하우, 또한 각종 마케팅과 판매 경험을 보유한 경영자적 마인드는 금세 일본 시장에서의 성장을 이끌어왔습니다. 특히 전쟁 중이던 당시 군용 항공기 타이어 등 상업용 항공 타이어를 생산하며 기술 경쟁력을 일찌감치 확보한 덕에 현재는 자동차 뿐 아니라 각종 민항기 비행기 시장에서도 브리지스톤의 시장 점유율은 무척 높습니다.
브리지스톤 로고
또한 사명을 지을 때부터 염두에 뒀던 해외 진출 역시 타이어 사업 진출 5년 만인 1936년부터 시작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의 경쟁력도 확장해 나갑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직접 생산 공장을 지어 전 세계 시장에 타이어를 실어 나르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타이어기업으로의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도 절반이 넘는 타이어 시장 점유율을 가진 브리지스톤은 1988년 미국 최대 타어어업체 중 하나였던 파이어스톤을 인수하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도 했습니다.
브리지스스톤 골프
또 이시바시의 도전은 타이어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브리지스톤은 1946년 타이어를 사용하는 자전거 시장에도 진출해 브리지스톤 사이클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일본내에서 폭넓은 제품군을 보유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자전거회사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골프채와 골프공 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처세의 달인, 친한파 일본 총리를 키워내다
이처럼 일생 정력적으로 다양한 사업에 도전하고 그 사업에서 시장 1위를 꿰찬 그의 인사이트는 정치권으로도 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이 된 일본. 그는 딸을 하토야마 이이치로와 결혼시켰습니다. 하토야마 가는 일본에서도 이름난 명문 정치 가문으로 이이치로는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냈습니다. 실제 이시바시의 딸은 상속받은 대부분의 재산을 남편의 정치를 내조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또한 이이치로의 아들,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9년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르며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린시절 하토야마 유키오(왼쪽)와 그의 어머니이지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유키오(오른쪽)
이처럼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 이시바시는 사업적인 감각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정무적 감각도 뛰어난 처세술의 달인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그 찰나의 틈새를 낚아챈 이시바시의 DNA는 여전히 브리지스톤의 타이어에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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