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바람피우니까 나도 맞바람”...막장 결혼생활에 너덜해진 그녀의 영혼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4. 2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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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가시목걸이를 한 자화상’, 1940,
독자분들은 혹시 수술해본 경험이 있나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한 번은 개복, 다른 한 번은 복강경 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신 마취가 풀리고 정신이 들 때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식이 풀릴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죠. 소변줄이 꽂혀 있어 스스로가 추접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한두 달의 회복기에는 느릿느릿 걷는 연습을 해야 하죠. 평소라면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가려면 서너배의 시간이 들고요. 한 번이라도 큰 수술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 아픔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 평생에 걸쳐 고통을 겪은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프리다 칼로입니다. 6세에 소아마비, 18세에 큰 교통사고, 세 번의 유산과 30여 차례의 수술을 겪었습니다. 말년에는 오른쪽 다리의 무릎까지 절단합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던가요.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프리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며 자신을 다독였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살아갔습니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시작한 그림
프리다는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 출신 이민자로 저명한 사진작가였습니다. 칼로 가족은 딸 넷을 둔 딸 부자 가족이었죠. 기예르모는 프리다에 대해 “넷 중에 제일 똑똑하고 나와 가장 닮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프리다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 기예르모는 네 딸 중 유일하게 프리다만을 국립대학 예비학교에 보냈습니다. 딸의 학구열과 열정을 알아본 아버지가 당시 드물게 여성에게 주어진 대학 진학 기회를 선사한 셈입니다. 프리다는 의대 진학을 희망했습니다.

5세의 프리다
그러나 1925년 프리다는 끔찍한 사고를 겪습니다. 프리다가 탄 버스가 교차로에서 도심 경전철과 부딪치는 사고였습니다. 그는 오른 다리에 11군데 골절, 오른발과 왼쪽 어깨가 탈골됐습니다. 이외에도 요추, 골반, 쇄골 하나, 갈비뼈 두 개, 치골에 골절상을 입습니다. 프리다는 평생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치료를 위해 프리다는 한동안 침대에 있어야 했습니다. 치료비로 학비를 모두 써버려 예비학교를 다시 다니지 못하게 됐죠.

이때 프리다의 부모는 그녀가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림 도구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특수 이젤을 주문해줬습니다. 고통과 고독을 견디면서, 프리다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프리다 칼로, ‘붉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회상’, 1926, 개인 소장.
‘붉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은 프리다가 그린 첫 자화상입니다. 프리다는 당시 남자친구 알레한드로에게 이 작품을 보내며 ‘당신의 보티첼리’라고 표현했습니다. 르네상스 화풍의 영향이 드러납니다. 프리다는 자신을 긴 목과 길쭉한 손가락으로 특징지으며 우아하게 묘사했습니다. 거센 파도와 짙은 하늘, 폭풍우가 치는 바다의 어두운 배경 덕분에 화면 중심에 있는 프리다가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후 알레한드로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서 둘의 연인 관계는 끝나지만 프리다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냈습니다. 훗날 그의 남편이 된 디에고 리베라입니다. 프리다는 당시 유명 화가였던 디에고를 직접 만나러 갔습니다. 벽화 작업을 멈추고 내려와 자신이 가져온 그림 몇 점을 살펴보고 솔직한 의견을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림으로 교감하던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1929년 결혼합니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와 디에고 결혼식 사진을 모티브로 보다 멕시코 전통 스타일로 변형해 표현한 그림입니다. 그림 속 프리다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빨간색 레보조를 걸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습니다. 프리다는 보통 자신의 눈빛을 단호하게 표현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부드러운 눈매가 돋보이고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한편 프리다의 손을 잡고 있는 디에고는 굵은 다리에 노동자들이 신는 커다란 작업용 장화를 신었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팔레트가 들려 있어 그가 화가라는 것을 강조했지요.

새가 물고 있는 배너에는 “여기 나, 프리다 칼로가 사랑하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 옆에 서 있습니다. 나는 1931년 3월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의 친구 앨버트 벤더를 위해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라고 써있습니다. 표면적으로 프리다가 스스로를 위대한 예술가의 아내로만 묘사하고 있으나, 글을 통해 이 그림의 작가가 프리다 자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막장 드라마를 능가한 결혼 생활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어느 막장 드라마보다도 더 다사다난했죠. 디에고는 바람둥이로 유명했으며, 프리다와의 결혼은 이미 그에게 세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비둘기와 코끼리의 결혼”이라며 딸을 말렸지만 프리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프리다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디에고의 바람기는 다시 시작됩니다. 디에고는 자신의 모델, 유명 여배우, 여성화가 등 수많은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프리다는 아이를 낳고 싶어했지만, 이미 디에고는 전 부인들 사이에서 자녀를 두고 있어 프리다와 아이를 가지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프리다 칼로, ‘나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 1928, 개인 소장.
그러던 중 프리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1934년 디에고가 자신이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자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사실은 프리다에게 큰 상처였습니다. 그들이 수개월에 걸쳐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프리다에게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죠.
프리다 칼로, ‘몇 개의 작은 상처’, 1935,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노 박물관, 멕시코시티.
‘몇 개의 작은 상처’는 그 무렵 프리다가 당시 뉴스 기사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술에 취한 남자가 한 여자를 스무번이나 칼로 찌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용의자는 “그냥 몇 번 찔렀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무심한 태도였는데, 이는 불륜을 저지른 이후 프리다를 대하는 디에고의 무심한 태도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결국 프리다는 디에고를 용서하고 그에게 돌아갑니다. 크리스티나도 용서합니다. 두 자매는 그 후 몇 년 동안 더 가까워졌고, 프리다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침대 옆을 지켰습니다. 디에고와 화해한 프리다는 그들의 관계를 ‘자유 결혼’ 형태로 결정하고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젠타 색의 레보조를 두른 프리다 칼로. 니콜라스 머레이 촬영, 1938년으로 추정.
디에고의 외도에 프리다도 맞바람으로 응수했습니다. 프리다는 1935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벽화 화가인 이그나시오 아기레와 짧지만 불타는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후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의 관계는 훨씬 길었고 감정적으로 유대가 깊었습니다.

뒤늦게 두 사람의 교제를 알게 된 디에고는 격분해 노구치에게 권총을 휘두르기도 했죠. 프리다는 헝가리 출신의 니콜라스 머레이와도 사랑에 빠졌습니다. 머레이가 피사체로 담은 프리다의 모습은 매혹으로 넘쳐납니다.

프리다 칼로(왼쪽)와 레온 트로츠키
이후 프리다는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인 레온 트로츠키와도 사랑에 빠졌습니다. 1936년 디에고는 카르데나스 대통령에게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망명시켜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대통령의 동의에 이듬해 트로츠키와 그의 아내는 멕시코에 도착해 프리다의 ‘푸른 집’에 머물렀죠. 프리다와 트로츠키의 존경심은 친밀감으로 바뀌었고, 둘의 불륜이 시작됐습니다. 이 관계는 수개월 동안 지속되다가 막을 내립니다.
프리다 칼로, ‘두명의 프리다’, 1939, 현대미술관, 멕시코시티
‘두 명의 프리다’는 프리다가 디에고와 이혼한 후 이별의 아픔을 담은 그림입니다. 두 명의 프리다가 상처받기 쉬운 심장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있는 작은 메달이 들려 있습니다. 이 메달은 핏줄을 통해 심장과 연결돼 있는데요. 왼쪽에 앉은 프리다는 메달을 가위로 잘라 버렸습니다. 프리다는 이 작품에 대해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두 명의 내가 손을 마주 잡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 1947, 개인 소장.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도 이혼 후 그린 그림입니다. 위에 보이는 악보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이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머리카락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머리는 삭발돼 버렸으니,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 1949, 개인 소장.
프리다는 디에고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이고 이중 연애 행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여전히 애증의 존재였습니다. ‘디에고와 나’에서는 디에고의 얼굴이 자신의 이마에 박힌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프리다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 디에고를 놓지 못하죠.
아픔을 딛고
프리다는 수많은 수술을 하며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고통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고, 고통을 통해 자신을 정의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노 박물관, 멕시코시티
‘헨리 포드 병원’은 유산 직후 완성된 작품입니다. 당시 프리다가 겪은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침대 위의 프리다는 벌거벗고 머리를 풀어 내린 채로 울고 있습니다. 침대 시트는 흘러나온 피로 흠뻑 젖어 있죠. 태아, 여성 생식기관 모형, 골반 뼈, 달팽이, 난초류와 기계류 등 떠다니는 물체들은 프리다가 가진 트라우마를 상징합니다.

프리다는 이 물체들의 의미를 설명한 적 있습니다. 달팽이는 그의 유산이 느리게 진행됐고, 부드럽고 아직은 덮여 있지만 동시에 열려 있기도 한 특징을 의미합니다. 난초는 디에고에서 가져온 특징으로 성욕과 감성을 상징합니다. 기계류는 프리다가 겪었던 시련이 가지는 기계적이고 무감각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개인 소장.
‘나의 탄생’은 프리다가 유산을 하고 얼마 지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린 그림입니다. 프리다의 상처 받은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텅 빈 방 한 가운데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성의 몸통은 침대와 시트로 덮여 있고, 허리 아래는 나체가 그대로 노출돼 있습니다. 넓게 벌어진 여성의 다리 사이에서는 머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침대 위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옆의 성모마리아 ‘마테르 돌로레사(슬픔의 어머니)’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가톨릭 봉헌 그림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얇은 주석판 재료, 화면 윗부분에 등장하는 종교적 인물, 화면 중심의 침대 위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 화면 아래에 놓인 두루마기까지 기존 봉헌화의 문법을 따랐습니다. 두루마리가 비어있는 점은 바라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출생, 아기의 유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을 통합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프리다 자신, 또는 프리다의 돌아가신 어머니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아기인 프리다 자신과 프리다가 잃은 아기 둘 다를 의미합니다.

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1944, 돌로레스 올메노 파티노 박물관, 멕시코시티.
고통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프리다가 보이나요. 이 작품을 그린 때 그녀의 건강은 악화했습니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보정기구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보정기구에 의지한 상체는 갈라져 속을 드러내고 있고, 척추를 상징하는 기둥은 부서져 있습니다. 온몸에 박혀 있는 바늘들은 프리다가 겪어야 하는 만성적인 고통을 상징합니다.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디에고의 끊임없는 외도로 겪는 마음의 고통도 보여주죠.
프리다 칼로,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않기를’, 1946, 개인 소장
이 작품에는 프리다의 모습이 두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편의 프리다는 수술대에 누워 허리에 난 피 흘리는 상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편의 프리다는 화려한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손에 보정기구를 들고 있죠. 다른 손에 든 깃발에는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시기에 프리다에게 힘을 실어 준 문구이자 이 작품의 제목입니다. 프리다는 이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응원한 셈입니다.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니콜라스 머레이가 찍은 프리다 칼로
결혼 후 프리다는 멕시코 원주민 의상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겁니다. 프리다는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지만 고국인 멕시코를 사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 그리고 나(패밀리 트리)’, 1936, 뉴욕현대미술관, 뉴욕.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 그리고 나’에선 자신의 가계도를 그렸습니다. 자신을 서너살 정도의 어린아이로 묘사했죠. 그림에는 실제 가족들이 살던 집이 있는데요. 저택 주변을 둘러싼 척박한 풍경과 노팔 선인장은 멕시코라는 걸 보여줍니다. 한 무리의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죠.

어머니 마틸데의 허리 리본에는 탯줄이 연결돼 있고, 그 끝에는 태아가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프리다는 그의 유전자에 기여한 모든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이들은 그의 혈통을 상징하는 리본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어린 프리다는 오른손에 리본을 들고 있습니다.

프리다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죠. 그러나 젠더, 다산성, 삶의 순환, 민족주의 등 폭넓은 주제도 탐구하고 있습니다. 나치가 우생학을 증명하기 위해 혈통 계보를 사용하던 시절, 프리다는 자신의 가계도를 묘사하며 자신의 혼혈성을 기꺼이 드러냈죠.

프리다 칼로, ‘내 유모와 나’, 1937,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노 박물관, 멕시코시티.
‘내 유모와 나’는 프리다가 멕시코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작품입니다. 그림 속 프리다는 아기의 몸에 성인의 머리를 하고 원주민 유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상반신을 벌거벗은 유모는 멕시코 고대 유물인 돌로 된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유모의 왼쪽 가슴에는 유관이 보이고, 우유 방울이 프리다의 입으로 떨어지죠.

이 작품은 기독교 도상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마리아와 어린이’ ‘모유 수유하는 마리아’를 프리다의 삶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멕시코 토착 문화의 상징들도 추가했습니다. 돌로 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유모는 특정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프리다를 키워낸 중남미 문화 전체를 상징합니다. 프리다가 자신을 모든 멕시코 원주민의 젖형제라고 정의한 셈입니다.

프리다 칼로, ‘내 드레스가 저기에 걸려 있다’, 1933, 개인소장
‘저기 내 드레스가 걸려 있다’는 뉴욕을 배경으로 합니다. 두 개의 기둥 사이 프리다의 멕시코 전통 드레스 테후아나가 걸려 있습니다. 한쪽 기둥 위에는 변기가, 다른 한쪽 기둥에는 황금빛 트로피가 놓여 있죠. 화면 위에는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인 엘리스 섬과 자유의 여신상이 있지만 이는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화면 아래는 신문에서 오린 이미지를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빵을 사기 위해 서 있는 긴 줄, 피켓 라인, 시위에 참여한 얼굴 없는 군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낭비가 만연하고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삶이여 만세
1950년대 들어 프리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합니다. 1953년 4월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을 열 기회가 열리지만 병세가 나빠지죠. 프리다는 구급차를 타고 들 것에 실려 갤러리에 입장해야 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행사에 참여했지만 그녀는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같은 해 프리다는 오른쪽 다리에 생긴 괴저로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하게 됩니다. 수술 전 프리다는 씩씩한 태도로 스스로를 안심시켰습니다. 일기장에 “발이 뭐 하러 필요해. 내겐 날 수 있는 작은 날개가 있는 걸”이라고 적었죠. 아무리 강인한 정신을 가졌더라도 그녀가 겪었을 육체적 고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수술 후 그는 “수 세기 동안에 걸쳐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다”며 “때로는 거의 미쳐버릴 뻔했다”고 밝혔습니다.

프리다 칼로, ‘비바 라 비다’(삶이여 만세), 1951~1954, 프리다 칼로 박물관, 멕시코시티.
수박이 있는 이 정물화는 프리다가 생전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숨을 거두기 8일 전 프리다는 그림 중앙 아래쪽 수박 과육에 “비바 라 비다!”, 즉 “삶이여 만세!”라고 적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일까요. 프리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기보다는 밝고 활기찬 삶을 기념했습니다. 또 고통의 순간에도 인생을 긍정했습니다.

수박은 딱딱한 껍질이 내부의 부드러운 과육을 보호합니다. 두꺼운 수박 껍질은 육체적 고통, 외도를 일삼은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을 견디기 위해 단단해졌던 프리다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프리다는 그 껍질 안에 신선하고 달콤한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수박의 수많은 씨앗은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죠.

프리다 칼로가 침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
프리다의 인생은 고통으로 점철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삶을 예찬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그림으로 거침없이 표현했고, 사랑과 기쁨도 마음껏 누렸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 또는 힘든 일이 있어 우울과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프리다는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며 “그래도 살 만 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화상을 그리며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이라고 적은 프리다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어떨까요.

<참고문헌>

-프리다 칼로(2018),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비엠케이

-수잔 바르브자(2023), 프리다 칼로: 스스로가 뮤즈였던 영원한 예술의 아이콘, 북커스

-클라우디아 바우어(2007), 프리다 칼로, 예경

-헤이든 헤레라(2003), 프리다 칼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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