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이 쌓은 정성과 수고로움의 맛 [ESC]

한겨레 2024. 4. 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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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화의 길라잡이 맛집 샌드위치
서울 서초구 렌위치의 샌드위치.

다양한 음식 문화가 복합적으로 뿌리내린 다민족 국가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큰 명절 뒤 남은 음식 재료들로 곧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터키(칠면조)와 과일, 채소, 크랜베리 소스 등 그저 남아있는 재료들로 투박하게 만든 ‘명절 샌드위치’는 평소에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샌드위치는 연휴의 즐거움과 넉넉함이 배어 유년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솔(soul)푸드로 여겨지기도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나눠 먹는 명절의 끝에 남은 나물로 비빔밥을 해먹고 전으로 잡탕찌개를 끓여 먹는 우리네 모습과도 퍽 닮았다.

요리 초년병 시절에 배운 샌드위치는 버터나 마가린을 식빵에 바르는 것이 기본이었다. 지방으로 빵을 코팅하여 속 재료의 수분이 빵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채소를 깔고 구운 베이컨이나 삶은 달걀을 썰어 넣고 토마토도 얇게 저며 넣었다. 빵을 포함한 속 재료의 영양 밸런스까지 따져 단백질·지방·탄수화물·비타민 등 영양이 골고루 들어가야 제대로 된 샌드위치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여겼다. 그 뒤 천연발효종이나 통곡물 등 발효와 재료의 차별화, 치아바타·베이글·크루아상 등 빵 종류 자체가 고급화 및 다양화되면서 빵 맛을 내세운 ‘심플 샌드위치’의 시대가 열렸다. 어느새 겉은 바삭, 속은 쫄깃하게 잘 구운 바게트 사이에 치즈 한쪽 또는 버터 한조각에 잠봉(돼지 다리 살로 만들어 얇게 저민 햄) 한장만 툭 넣어도 풍성한 맛의 조화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약해 보이지만 맛은 고수다. 몇장에 걸쳐 잡다한 경력을 서술해 놓은 구직 이력서가 푸짐한 샌드위치라면 심플 샌드위치는 단 몇줄로도 충분하게 어필되는 프로의 이력서 같았다. 그때부터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먹을 때 빵에 큰 우선순위를 두게 됐다.

서울 강남구 타운샌드위치의 샌드위치.

대학 시절 국민영양조사를 하러 시골로 내려가 선후배가 합숙한 적이 있었다. 당시 몇날 며칠을 토속 밥상만 줄곧 먹어 모두의 입맛이 도시의 맛을 갈구할 때쯤, 한 선배가 본인의 특기라며 김치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떠오른다. 아마도 배추김치의 물기를 없애고 참기름·깨소금·설탕을 넣어 양념한 뒤 흔한 가게 식빵 사이에 넣어 만든 ‘냉장고 털이’ 샌드위치 수준이었을 것이다. 계속된 시골 밥이 지겨웠던 상황이 시너지를 일으킨 탓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강렬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촉촉한 샌드위치 층층이 자리 잡은 ‘수분의 조화’였으리라. 김치가 들어가 적당히 수분을 부여하면서 빵의 퍽퍽함이 사라졌고 거기다 특유의 스파이스 향까지 조화를 이룬 최고의 응급 샌드위치로 기억한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고 ‘샌드위치력(歷)’이 쌓이다 보니 점차 샌드위치 전체의 조화를 더욱 중시하게 됐다. 빵과 재료를 한꺼번에 먹었을 때 모든 재료의 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적당한 촉촉함, 각 재료가 서로 거스르지 않고 화합하여 느껴지는 맛과 식감의 조화 말이다.

화려한 속재료를 쫓던 초창기를 지나 오로지 빵에 탐닉하던 시기를 넘어 이제는 조화의 샌드위치를 추구하는 나이가 됐다. 빵과 속재료를 그때그때 따뜻하게 굽고 재료에 따라 소스와 채소 조합을 달리하여 층층이 정성과 수고로움을 쌓아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게 ‘핫(hot) 샌드위치’다. 세월의 레이어가 샌드위치 재료처럼 층층이 쌓인 요즘의 입맛 추구에 마침맞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요리형 샌드위치다.

서울 강남구 베카프리미엄델리샵의 샌드위치.
샌드위치 맛집

렌위치

미국 맨해튼에서 35년간 현지의 입맛을 사로잡은 렌위치는 진정한 샌드위치 문화를 전파하고자 한국에 진출했다. 소의 양지 부위를 건조·훈연한 파스트라미(pastrami)는 간혹 퍽퍽한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 대표 샌드위치인 ‘레니스’에는 코울슬로가 들어가 있어 촉촉함이 최적이다.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176 신세계백화점 지하1층/02-0305-0023/레니스 1만5000원

타운샌드위치

타원형 볼(bowl) 속에 담긴 샌드위치는 다소 평범해 보일지 모른다. 스모크햄·치즈·양상추·토마토가 아주 풍성하게 들어있다. 빵 식감은 딱딱하지도 지나치게 부드럽지 않기에 씹고 넘기기 편하고 속재료와 무난하게 조화롭다. 평소 빵을 잘 안 먹는 사람들도 소화하기 편하다고 평가한다. ‘가성비’도 대만족.

서울 강남구 논현로74길 5 101호/0507-0289-5099/타운샌드위치 7800원

베카프리미엄델리샵

화려한 큰 접시에 담긴 샌드위치를 받으면 대접받는 기분이 된다. 바삭하고 따끈하게 구운 호밀빵 사이에 72시간 허브에 재운 닭가슴살, 치즈, 토마토, 파슬리 아이올리 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나온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삭촉촉 밸런스가 일품이다. 실력 있는 셰프의 손길이 닿은 요리형 샌드위치의 진수다.

서울 강남구 역삼로 521 101호/010-9737-6021/72시간파슬리치킨 1만1800원

이윤화 다이어리알 대표/‘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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