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처럼 먹는 한솥밥…나는 점점 무거워졌다

한겨레 2024. 4. 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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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남극의 밥
정성어린 식사에 생애 최고 체중
‘못 먹인 음식’ 안타까워하는 셰프
기지 부엌에서 독학으로 빵 구워
물리적 한계 속 애틋함 돈독히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것도 셰프가 정성을 들이는 일이다. 2월 첫째·둘째 주에 생일을 맞이한 월동대원 권오석·송석록·이병학·이창재 대원(왼쪽부터)이 촛불을 끄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유빙이 기지 해안가까지 몰려와 있었다. 하얀 포말과 함께 해안을 채우고 있는 얼음들, 앞으로 미는 파도의 힘에 엉거주춤 지상으로 잠시 올라와 앉는 덩어리들. 내 방은 유빙 무리가 잘 보이는 쪽에 있었고 아침마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조차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존재에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면 그것이 자연을 향할 때 가장 아름다워지고 한편 대범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펭귄·새 모양의 자연 얼음조각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휴일이라 식당을 혼자 어슬렁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나중에 내가 ‘월동 천사’라고 이름 붙이게 되는 월동 연구대원 엠(M)이었다. 월동 천사는 그렇게 묻고는 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식당의 설비들을 찬찬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어디에 밑반찬이 있고 라면 끓이는 기계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탄산수는 어떻게 만들어 마실 수 있는지. 세종기지에는 탄산수 제조기까지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었다. 카페인 민감자라 우유를 넣은 라테만 마실 수 있는 나는 한국에서 몇 가지 분말 커피를 시험한 끝에 더블샷 라테를 50개나 가지고 왔는데, 그 모든 준비가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에는 당연히 우유 거품기도 달려 있어 원하는 모든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세종기지의 야식을 책임지는 자동 라면 조리기.

“또 뭐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월동 천사가 다시 물었고 나는 갈등했다. 기지에서는 체류자들만 사용하는 인트라넷과 메신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설명서에 쓰인 대로 해도 휴대전화에 앱을 설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일까지 부탁해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 월동 천사는 “뭔가 문제가 있으시군요” 하고 내 마음을 짚었다. 난처해하는 누군가의 표정을 끝까지 살필 줄 아는 세심함이라니 이 사람은 구원의 천사가 아닌가 싶었고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빙이 많아서 놀랐잖아요.”

“네, 날이 맑고 좋으면 빙벽이 더 잘 무너져요. 그리고 몇 시간 지나면 기지 앞으로 이렇게 와 있고요.”

알고 보니 그는 지질과 지구 물리를 전공한 연구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많은 유빙들이 펭귄이나 새 모양이라는 거죠. 월동대원들끼리 연구 대상이라고 얘기해요.”

해안가에 도착한 유빙들을 관찰하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한 남극 활동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얼음들은 신기하게도 ‘에스’(S) 자 모양의 유선형 몸통을 한 오리나, 부리가 뾰족한 펭귄들처럼 보였다. 미지의 것을 익숙한 형태로 환원시켜 인지하는 인간들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자 월동 천사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하고는 이전 월동대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바람이 심한 겨울날, 눈발이 휘몰아치는 세종기지 선착장에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한다. 하얗게 얼어붙은 맥스웰만을 바라보며 그는 기지를 등지고 있었다. 기지 대원들은 모두 실내에 있는데 대체 누가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걸까. 위험하다 싶어 선착장으로 달려가 보니 그는 킹펭귄이었다고 한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남극의 여름은 어느 때보다 푸르렀고 나는 일부러 얼음이 있는 곳을 찾아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현존하는 펭귄 가운데 두번째로 큰 킹펭귄은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섬에 무리를 이뤄 살기 때문에 세종기지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을 것이므로 그 킹펭귄은 남위 62도13분까지 내려왔고 세종기지 선착장 위에서 ‘펭생’의 무게를 짊어진 지친 뒷모습을 기지 대원들에게 들킨 것이었다. 실제로 지구 온난화에 따른 엘니뇨 현상으로 킹펭귄의 서식지는 90% 가까이 파괴되었고 점차 남극대륙 쪽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한다.

“기지에서 생활하시다 어려운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인트라넷 문제를 해결해준 그는 고마운 말을 남기며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군가 식당에 나타나지 않으면…

기지에 머문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아주 ‘무거워지고’ 있었다. 샤워실 체중계에 올라가 보면 매번 숫자가 달라졌다. 나는 글쓰기에 필요한 적정 체중을 정해놓고 그 이하로 내려가면 식사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생애 최고의 몸무게를 경신하고 있었으니까. 손맛이 좋은 우리 남극의 셰프는 대원들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매번 넉넉한 열량의 음식을 공급했다. 닭갈비, 엘에이(LA)갈비, 돈가스, 치킨가스, 차슈덮밥, 고구마맛탕… 돼지껍데기볶음. 주전공이 중화요리여서 특히 튀김요리가 환상적이었다. 그가 튀긴 돈가스와 라조기는 한국 유명 맛집보다 월등히 맛있었다.

돈가스를 곁들인 오므라이스.

쟁반에 각종 접시와 국그릇 등을 담고 줄을 서 있으면 주방에서는 두명의 대원이 정신없이 우리의 식사를 챙기고 있었다. 메인 셰프 외에도 기지 체류 인원이 많은 하계 기간에는 보조 셰프가 함께 일했다. 셰프는 얼굴은 동자승처럼 동글동글했지만 체격이 다부졌고 중화요리 전문가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어딘가 고수의 무뚝뚝한 포스가 넘쳤는데, 막상 대화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먹인’ 음식보다 ‘못 먹인’ 음식들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마음이었다. 그는 제빵 자격증을 따오지 못해 빵을 제대로 못 먹이고 있다며 한탄한 끝에 기지 부엌에서 독학으로 빵을 굽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솜털을 부풀려가는 아기 펭귄들처럼 더 촘촘히 지방을 체내에 축적하고 있었다.

“작가님 정말 잘 드시네요. 첫인상은 채식만 하실 줄 알았는데….”

밥을 와구와구 먹고 있는데 엠이 말했다. 나는 사람 잘못 봤다고, 나는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엠은 큰 키와 체격에 비해 많이 먹지 않았고 걱정되거나 초조하면 양이 더 줄어들었다. 각자의 연구 분야를 소개하는 세미나가 부담스러운지 한숨을 쉬었다. 내일로 잡힌 그 행사의 식생팀 발표자는 당연히 엠 박사였다. 상사인 엘(L) 박사에게 시킬 수는 없으니까.

케일주스.

“작가님은 왜 발표 안 하세요? 누구보다 사람들이 궁금해할 텐데.”

엠 박사는 스트레스가 가중되면서 ‘물귀신’이 되기 시작했다.

“저는 여러분 얘기를 들으러 온 사람이지 제 얘기를 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 역시 발표는 부담스러웠으므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될 사람이니 제 생각은 모두 그걸 통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벡터도 내일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해서인 것 같았다. 벡터의 노트북에는 그동안 만난 사람들에게서 받은 수십개의 엠블럼들이 붙어 있고 놀랍게도 휴대전화에는 오천개가 넘는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나중에 벡터가 내 이름이라도 기억하겠느냐고 농담했다.

식당이 있는 1층 복도에는 그간 세종기지를 지킨 월동대원들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중에는 조리 대원이 유니폼이 아니라 요리사 모자와 복장으로 셰프로서의 정체성을 뿌듯하게 드러내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도서관을 드나들 때마다 멈춰 들여다보곤 했다.

셰프가 정성스레 마련한 메뉴. 햄버거와 감자튀김.

“언젠가 한 대원이 자기 생일에는 꼭 스테이크를 해달라고 졸라대더라고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너무 진지해서 셰프가 정말 스테이크를 만들어줬죠. 그러자 그날 정장을 완전히 차려입고 식당에 나타나서 음식을 먹더라고요. 셰프의 정성에 값하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면서요. 그러자 기지 식당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고 오성급 호텔 안 부러운 저녁이 되었어요.”

장보고기지에서 겪은 추억담을 누군가가 들려주었다. 나는 마음이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워졌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나도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물리적 한계가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정다움과 애틋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식당에 안 나타나면 이제 궁금했고 밥 먹고 나서 누가 바로 일어서버리면 서운했다. 후식 커피를 먹지 않더라도 맹물이라도 가져와 함께 앉아 있어야 ‘완전한’ 식사가 된 것 같았다. 하루 일과를 보내고 각자 방으로 돌아오면 서로를 찍은 ‘노동 사진’을 주고받았고 “작가님 사진 잘 찍으시네” 하는 칭찬을 들으면 “그게 다 애정으로 찍어서 그렇답니다” 하고 답했다. 왜 사람들이 남극에 오고, 한번 온 사람들은 왜 그 긴 여정을 거쳐 다시 오게 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펭귄과 빙하와 남극좀새풀과 해양조류 같은 연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과의 ‘생활’ 때문이기도 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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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자린고비들

“우리 가위바위보를 하면 어떨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데 홍 선생이 제안했다. 사용한 식기는 각자 부엌으로 들고 가 애벌 설거지를 한 다음, 폭발적인 수압으로 가동되는 식기세척기에 넣는데, 부엌도 복잡하고 그릇도 많지 않으니 ‘몰아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설거지가 그다지 귀찮은 일은 아니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대부분 그러자고 했고 안드레아만 빠졌다.

“저는 그런 건 안 하기로 돌아가신 할머니와 약속했어요.”

“그런 거요? 그런 거 뭐요?”

모두들 뭘 내서 이길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생각이라는 걸 한 적 없는 나는 안드레아의 말에 더 관심이 갔다. 안드레아가 범상치 않은 몽상가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말없이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회식 때는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셨고 대기빙하관측소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으며, 세종기지 마크가 그려져 있지만 우리 것과는 다른 오래된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10년도 넘은 그 낡은 유니폼은 그가 처음으로 남극 땅을 밟았을 때 받은 것으로 누가 물어보니 “버릴 이유가 없으므로” 매번 입고 남극을 찾는다고 했다.

“사행심이 깃든 거요. 도박이라든가….”

가위바위보는 도박과는 좀 다르지 않나 싶었지만 나는 안드레아의 거절이 안드레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주먹만 내.”

모두들 한손을 내밀며 준비하고 있을 때 홍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들 보자기를 내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그런 정보를 흘리는가. 그때까지 신실한 과학자로서의 면모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것이 홍 선생의 계략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가위바위보에 져서 매번 설거지 담당을 하고 나서야.

우리가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남극의 셰프는 부엌을 정리하고 다음번 우리에게 공급할 영양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지의 모두가 서로 다른 종이 공생하는 지의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나면 필드로 나가 이 대륙에 관한 미미한 진실을 얻어와야 하는 우리는 광합성을 담당하는 미세조류나 남세균에 가까웠고 그런 우리가 추위에 지지 않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셰프는 유기산과 화합물로 공동체의 방어선을 만드는 든든한 균류였다.

기지 식당 벽면에 붙인 자기소개서. 세종기지를 찾은 이유를 대원 모두에게 설명하며 인사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연구동으로 돌아오다가 나는 마음속으로 어느덧 ‘언니’라고 부르게 된 카밀라 박사님에게 벽시계 건전지를 갈아야겠다고 말했다. 며칠 전 어차피 한달 있으면 떠날 테고 그 뒤로는 아무도 이 방을 쓰지 않을 테니 굳이 갈아야겠냐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드디어 결심하셨군요!”

카밀라 언니가 눈을 반짝였다. 건전지 얘기를 했을 뿐인데 어떤 활기가 되어 전달된 것 같았다. 언니는 나를 데리고 홍 선생에게 가서 건전지가 필요하다고 당당히 말했다. 홍 선생이 건전지까지 담당하나 의아했는데 이내 그는 수십개의 건전지가 든 비닐을 꺼내 그중 두개를 건네주었다. 건전지들은 모두 중고였다.

“벽시계면 확실히 1년은 돌아갈 거예요. 내가 보장해요.”

나는 그때서야 물자가 귀한 남극에서 과학자들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는 엄청난 자린고비로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용량 실험 장치를 돌리다 남은 건전지도 모아 재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작가님이라 특별히 많이 남은 배터리를 주겠다며 홍 선생이 진지하게 건넨 건전지를 받아 이층으로 올라가다가 “여자 샤워실 시계도 제가 갈게요!” 하고 소리쳤다. “작가님, 멋져요!” 하고 카밀라 박사님이 격려해주었고 뜨거운 웍을 흔드느라 땀을 흘리는 남극의 셰프처럼 열심히 달려간 나는 발판을 딛고 올라가 멈춰 있는 벽시계들에 밥을 주었다.

글·사진 김금희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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