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대체 윤 대통령의 국정 비전은 뭔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2024. 4. 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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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다. 친윤 원내대표를 세우겠다는 집권세력말이다. 대통령 때문에 총선 참패하고도 답정이(李)라니! 흥분해 이런 소리를 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나라를 구했다고 도사처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주로 우파에서 나오는 소리다. ‘이재명 대통령’의 탄생을 막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다는 거다.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왼쪽)과 윤재옥 원내대표. 두 의원은 최근 비공개로 만나 차기 당 운영 관련 논의를 한 걸로 알려졌다. ‘찐윤’으로 불리는 이 의원은 차기 원내대표로 하마평이 나오고 있다. 뉴스1
만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면 어떤 대한민국으로 바뀔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기본소득이 온 국민을 받쳐줘 일 안해도, 노력 안 해도(학생은 공부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없는 안심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습니다)’하는 기막힌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물론 정반대가 될 공산도 크다. 2년 전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후보를 찍은 48.56% 민의 중 상당수는 이런 걱정근심의 반영이었다.

● ‘공정과 상식’은 국정원칙이었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 어떤 대한민국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공정과 상식의 나라? 이미 깨졌다.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보니 심지어 ‘공정과 상식’은 국정운영의 원칙이었다. ‘이념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에 기반해 국정을 운영하고,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친절히 설명한다. 헹. 김건희 여사 문제만 봐도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대통령실의 국정운영 원칙 ‘공정과 상식’은 정부기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왼 쪽부터 올해 2월 반부패·청렴정책 추진과제 전달회의, 이달 25일 대검찰청 법의날 기념식 퍼포먼스, 지난해 11월 국민권익위원회 공공기관감사인 워크숍 장면.
연금·노동·교육 개혁?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윤 대통령도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지속할 수 있는 연금개혁의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2022년 말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밝혔다. 차질 없이 진행된대도 임기 중엔 개시도 못한다는 소리다.

같은 날 윤 대통령은 노동유연성 개혁도 강조했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국제시장에서 3류, 4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발표된 로드맵에 따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는 이미 작년 하반기 이뤄졌어야 했다. 이런 식이면 3년 후 우리는 3류, 4류로 전락한 나라에서 살 판이다.

● 국정비전이 ‘다시 대한민국!’이라고?

그럼 교육개혁이라도 성공하면 우리 아이들은 좋아질까. 2025년 우리나라는 국가교육과정에서 세계 최초로 AI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 나라가 된다(는 계획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과 대입제도가 그대로면, 사교육에 목매는 현실도 그대로일 게 뻔하다. 그밖에 또 윤 대통령이 무슨 일을 도모해 어떤 나라로 이끌어갈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하도 답답해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국정비전’이라는 문패를 클릭하니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가 뜨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비전이 그거였다니! 취임사에서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한다는 뜻인 듯하다. 취임사 맨 끝에서도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라고 재차 강조했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의 국정비전 소개 화면. 대통령실 홈페이지 캡처
말은 좋되… 공허하다. 윤 대통령이 자유를 수십번 강조한 것은 알겠는데, 지금 적잖은 정치평론가와 기자들이 방송에 나와 “이런 말하면 고소당할까 봐…” 우려한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자유를 외치는 건 코미디다. 윤 대통령-검찰 연대가 확고한 것은 알겠는데, 총선에서 야당 찍은 이들은 “대통령 주변은 당당하냐” 코웃음 친다. ‘인권과 공정과 연대의 가치가 기반인 나라’는 조롱거리가 된 거다.

● 참모가 써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

그래서 대통령의 ‘비전’이 절실한 것이다. 앞으로 3년 꾹 참고 윤 대통령을 지지하면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SK의 전신인 선경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후 장기 경영 목표를 정보통신사업 진출로 정하고 ‘2000년대 세계 일류의 정보통신기업’을 새 비전으로 제시했었다. KT를 인수하기 한참 전부터 이런 비전이 있었기에 오늘의 SKT도 가능했을 터다.

하다못해 노태우 대통령(1988년 2월~1993년 2월 재임) 시절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이 있었다(비전대로 됐느냐고 따지지 마시길. 다만 ‘권위주의 종식이라는 그림만은 분명히 그려지지 않는지?) 그 불후의 구호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는 실은 유능한 참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이던 1992년 6월 29일 6·29선언 제5주년을 기념해 ‘보통사람들과의 대화’ 행사를 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후보 때부터 ‘보통 사람’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동아일보DB
언론인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김영삼 대통령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는 회고록 ‘시대의 조정자’에서 이렇게 썼다. 노태우 대선 후보의 연설문을 전담했던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회고록 속 표현. 당시엔 민정당 의원이었다)가 하루는 대선에서 매우 중요한 연설문이라며 민정당 정책위의장이던 자기 방을 찾아왔더란다. 읽어보니 밋밋하고 신문사에서 쓰는 말로 ‘야마’(山·강조점)가 없었다.

생각 끝에 “위대한 평민의 시대를 열겠다”는 구절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김학준은 ‘평민’을 ‘보통 사람’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했다.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 윤 대통령은 왜 참모들 도움을 받지 않나

‘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노태우가 무탈하게 대통령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하게 참모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남재희는 평가한다. 유능한 참모들의 집합적 합의에 따라 정치를 한 결과였다는 거다(회고록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김학준 공보수석이 청와대를 떠나는 퇴임식 때도 김학준 자신이 써준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더라고 했다^^ 하지만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은 노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했다. ‘대통령 퇴임식’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었다는 게 팩트다.).

‘물’과는 거의 상극일 듯한 윤 대통령은 연설문도 직접 쓴다고 알려져 있다. 검찰 공소장을 많이 쓴 경험에다 자신이 제일 잘 쓴다는 자신감 때문일 터다. 취임사도 윤 대통령이 다듬고 수정해 거의 새롭게 쓴 원고였다(그래선지 기억에 남는 명구절은 없다). 국민을 가르치는 것 같은 51분간의 의대 관련 대국민담화, ‘그러나’와 ‘하지만’이 15번이나 들어간 총선 참패 국무회의 모두발언 역시 윤 대통령이 손을 댔다는 후문이다.

올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이 KBS에 출연해 신년 대담을 하는 모습. 대통령실 제공
올초 KBS 신년대담에서 윤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준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보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재앙이었음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혈세 내는 입장에선 가슴이 미어질 판이다. 손해가 곱절이서다(제 할 일 못하는 국정메시지비서관한테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줘야하느냐고요!).

● 사람을 부리는 것이 임금의 능력

신하는, 요즘 말로 관료는, 자기 일 잘하면 최고다. 하지만 임금은 달라야 한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도 없지만 자신이 더 잘 한다고(그리고 잘 안다고) 신하가 할 일까지 떠맡아 하는 임금은 임금답지 않다.

‘신하는 스스로 어떤 일을 자임하는 것을 능력으로 삼고 임금은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써 능력을 삼는다’. 중국의 인재학 고전 ‘인물지(人物志)’에 나오는 귀절이다. 유능한 참모를 찾아 앉히고 제대로 부려먹는 것이 대통령의 능력이라는 의미다.

비서실장 하나 바꾸는데도 그리 뜸을 들이더니 어쨌든 새 사람이 들어왔다. 정상적 대통령실이라면 5월 10일 대통령 취임 2주년을 기해 기자회견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김치찌개 간담회’로 퉁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윤 대통령이 “김치찌개” 소리 할 때마다 슬프다. 기자가 김치찌개에 환장한 줄 아시는지). 정진석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이 과연 유능한지, 윤 대통령이 사람 볼 줄 알게 됐는지, 기자회견에서 재차 확인될 것이다.

정진석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달 22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임명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스1
● 자칫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

대통령 모두 발언만은 제발 참모가 써준 대로 읽기 바란다. 그 속에 국민을 어떤 나라로 이끌겠다는 비전을 다시 담아 분명히 전달해주었으면 한다. 취임사에 쓴 ‘글로벌 리더 국가’나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 1도 다가오지 않는다(총선 참패한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길…).

설 명절 때 대국민 메시지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노래를 부른 것이 국정운영 비전인 ‘따뜻한 정부’를 부각시키려고 그랬다는 건데 아…그게 비전인지는 동아일보 기사보고 처음 알았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 정부가 따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한남동과 대통령 주변이 아니라면).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합창단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를 노래하는 모습. 2024년 설 메시지로 ‘따뜻한 정부’ 비전을 전하기 위해서란다. 대통령실 제공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윤 대통령만의 비전이랄 수 없다. 차라리 “공정과 상식으로 돌아가겠다”며 지난 2년의 과오에 고개 숙인다면, 국민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자신 없으면 이제라도 국민이 기억할 만한, 그리하여 희망을 갖고 따라갈 만한 비전을 새롭게, 제대로 제시해주기 바란다. 또 타이밍을 놓치면 윤석열 정부는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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