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게, 밥 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음란서생]

배순탁 2024. 4. 2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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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말리 전기 영화 〈밥 말리: 원 러브〉를 봤다.

수렁에 빠질 뻔한 영화를 위대한 밥 말리의 음악이 겨우 건져내준 작품이라고.

자메이카 출신 레게 뮤지션은 밥 말리 외에도 부지기수였다는 걸.

밥 말리로만 레게를 정리하는 건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서태지 딱 하나만으로 단순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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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메이카 음악은 멘토(mento)라고 불렸다. 그러나 미국 로큰롤이 자메이카에 수입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 레게 가수 밥 말리. ⓒAP Photo

밥 말리 전기 영화 〈밥 말리: 원 러브〉를 봤다. 글쎄.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별 감흥은 없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렁에 빠질 뻔한 영화를 위대한 밥 말리의 음악이 겨우 건져내준 작품이라고.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다. 따라서 개인 감상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약은 약사에게, 영화는 김세윤 작가에게.

밥 말리가 누군가. 레게 하면 영순위로 떠오르는 이름이다. 과연 그렇다. 장르의 대표를 넘어 장르 그 자체가 된 음악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걸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자메이카 출신 레게 뮤지션은 밥 말리 외에도 부지기수였다는 걸.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밥 말리로만 레게를 정리하는 건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서태지 딱 하나만으로 단순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원래 자메이카 음악은 멘토(mento)라고 불렸다. 1950년대쯤이다. 그러나 미국 로큰롤이 자메이카에 수입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가 되자 자메이카인들은 주말이 되면 공터에 모여 함께 춤을 췄다. 이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밴드는 거의 사라지고, 사운드 시스템이 이를 대체했다. 사운드 시스템은 DJ, 엔지니어, MC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 야외에서 즉석 무대를 만들어 라이브를 들려주는 포맷을 뜻한다. 그것은 당시 라디오가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자메이카에서 최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이 바로 콕슨 도드가 프로듀스한 ‘이지 스내핀(Easy Snappin', 1959)’이다. 그는 기타를 깎아 치듯 연주하는 방법으로 자메이카 특유의 오프비트를 강조했다. 그들은 ‘스카-스카’처럼 들리는 기타 소리에서 장르명을 그대로 따왔다. 이후 스카(Ska)는 프린스 버스터가 프로듀스하고 포크스 브라더스가 노래한 ‘오 캐롤라이나(Oh Carolina, 1960)’로 절정을 이뤘다. 1993년 섀기가 커버해 세계적 성공을 거둔 바로 그 곡이다.

스카는 자메이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62년에 이르러 완전히 폭발했다. 자메이카는 이후에도 영국과 교류를 이어갔는데 이 과정을 통해 스카는 더 부드러운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면에 나선 브라스가 물러나고, 속도는 느려졌다. 가사는 달콤한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을 주로 노래했다. 사람들은 이걸 록스테디(Rocksteady)라고 불렀다. 록스테디는 서구 팝에 영향을 받은 만큼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블론디(Blondie)가 자메이카 밴드 파라곤스(The Paragons)의 1967년 오리지널을 리메이크한 ‘더 타이드 이즈 하이(The Tide Is High)’가 바로 록스테디다.

기실 레게는 1968년이 되기 전까지 통용되지 않는 용어였다. 최초의 레게는 보통 래리 마셜의 ‘내니 고트(Nanny Goat)’로 정리된다. 앞서 언급한 콕슨 도드가 프로듀스한 곡이다. 콕슨 도드는 이 곡에서 에코를 넣을 수 있는 기계를 실험해 기타의 오프비트를 한층 더 강조했다. 이 소리가 마치 ‘레게’처럼 들려서 레게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밥 말리의 경우, 1961년부터 활동하면서 이미 100개가 넘는 트랙을 녹음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10년 넘게 계약과 해지를 반복하고, 미국 투어에 갔다가 사실상 실패하는 등 성공을 위해 엄청나게 고군분투했다. 그 와중에 밴드 멤버들은 여러 이유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의 운명 앞에 와일드카드가 던져진 건 1974년이 되어서였다. 저 유명한 에릭 클랩턴이 그의 곡 ‘아이 샷 더 셰리프(I Shot The Sheriff)’를 커버하면서 원작자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했다. 비평가 밥 스탠리는 밥 말리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백인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자메이카의 문화가 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레게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레게는 팝의 일상 속으로 흡수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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