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라이어 케리 발굴, 결별, 복수…주인공이고 싶었던 제작자

한겨레 2024. 4. 2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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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토미 머톨라
공격적 프로듀서·매니저 경력
1990년 소니뮤직 대표 자리에
케리와 결혼 화제…5년만에 파경
제니퍼 로페즈 내세워 ‘고춧가루’
토미 머톨라가 2019년 10월 미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2676번째 별이 된 행사에 참석한 모습. AFP 연합뉴스

1990년대 초 어느 날 당신은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이냐, 머라이어 케리냐. 세상은 참 재미있다. 하나의 영웅이 탄생하면 꼭 라이벌을 탄생시킨다. 앙리 마티스가 태어나면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다. 남진이 태어나면 나훈아가 태어난다. 아사다 마오가 태어나면 김연아가 태어난다. 빌 게이츠가 태어나면 스티브 잡스가…. 그만하자. 세기의 라이벌 리스트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듯이 아슬아슬하게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하든 진보와 보수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이어가는 것도 큰 틀에서 보자면 ‘균형의 법칙’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당신은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케리 중 한명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이다. 두 가수를 동시에 좋아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두 가수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먼저 데뷔한 건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나는 그가 세상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몇년 뒤 머라이어 케리가 데뷔했다. 미디어는 두 가수를 시대의 라이벌로 포장했다. 어떻게든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려 작정했다. 팬들도 거기 뛰어들었다. 누가 더 노래를 잘하냐, 누가 더 예쁘냐, 누가 더 오래갈 것이냐, 누가 더 많이 팔 것이냐. 1990년대 내내 사람들은 그걸 궁금해했다.

라이벌이었던 머라이어 케리(왼쪽)와 휘트니 휴스턴이 1998년 엠티브이(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시상자로 함께 선 모습. AP 연합뉴스

둘은 달랐다. 휘트니 휴스턴은 어리사 프랭클린, 디온 워릭 같은 성가대 출신 흑인 여성 가수 계보를 잇는 적자였다. 그는 시원시원하게 고음을 뽑아냈다. 머라이어 케리는 조금 더 현대적이었다. 시원시원한 동시에 예리한 기교가 넘쳤다. 머라이어 케리가 데뷔하던 시절 음반사인 소니뮤직은 그를 ‘하얀 휘트니 휴스턴’이라고 포장했다. 꽤 천재적인 포장이었다. 머라이어 케리는 혼혈이지만 겉모습은 백인에 가까웠다. 소니뮤직은 백인과 흑인 청취자 모두에게 소구하던 휘트니 휴스턴으로부터 팬덤을 빼앗아 오고 싶었을 것이다. 더 젊고 더 하얗고 더 섹시한 휘트니 휴스턴이라는 홍보는 야비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그걸 만들어낸 것은 당시 소니뮤직 대표이자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 중 한명인 토미 머톨라였다.

재능 발굴하는 ‘눈과 귀’

토미 머톨라는 1948년 7월14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는 가수가 되고 싶던 남자였다. 1966년 밴드 ‘엑소틱스’에서 리드 보컬을 맡으며 가수 경력을 시작했으나 밴드의 생명은 금방 끝이 났다. 대신 그는 프로듀서이자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매니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르게 좋은 재능을 발굴하는 눈과 귀다. 토미 머톨라에게는 눈과 귀가 있었다. 그는 음반 회사 ‘챔피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1970년 팝 듀오 ‘홀 앤 오츠’를 발굴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불과했던 토미 머톨라는 홀 앤 오츠에게 자신의 경력을 걸기로 했다. 베팅은 성공했다. 한국에도 팬이 많은 홀 앤 오츠는 1980년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홀 앤 오츠의 성공은 토미 머톨라의 경력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팝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회사 중 하나인 소니뮤직은 토미 머톨라를 영입했다. 토미 머톨라는 1990년 소니뮤직 대표 자리에 올랐다.

머톨라가 기획한 남성 듀오 ‘홀 앤 오츠’가 2013년 9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공격적이다. 공격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내는 정치력 없이 그저 재능으로만 성공하기에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만만치 않은 세계다. 토미 머톨라는 그토록 무시무시한 업계에서 성공할 만한 재능이 있었다. 야생동물 같은 공격성이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매니저로 유명했던 그에 대해서 홀 앤 오츠는 1974년 ‘지노(Gino)(The Manager)’라는 노래를 만들기까지 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이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거라고 엄마를 걸고 말했지! 거기 사인해! 사인해! 열심히 일하면 뭔가를 얻을 거라는 걸 기억해.” 토미 머톨라는 이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티스트보다도 더 아티스트의 에고를 가진 매니저였다.

토미 머톨라의 가장 거대한 업적은 머라이어 케리였다. 그는 젊은 머라이어 케리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스타 탄생을 예감했다.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케리의 첫 앨범은 무려 4곡의 빌보드 1위를 낳았다. 나는 아직도 그의 데뷔곡 ‘비전 오브 러브’(Vision Of Love)를 매주 한번은 듣는다. 음악 역사상 최고의 데뷔곡 중 하나다. 토미 머톨라는 머라이어 케리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가 만들어낸 가수의 이름만 나열해도 그것 자체로 1990년대 역사나 다름없다. 그는 셀린 디옹, (비욘세가 멤버였던) 데스니티스 차일드, 샤키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도 토미 머톨라와 손을 잡고 음반 ‘데인저러스’(Dangerous)와 ‘히스토리’(History)를 내놓았다.

토미 머톨라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비즈니스 때문이 아니었다. 사생활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발탁한 머라이어 케리와 사랑에 빠졌고 1993년 결혼했다. 머라이어 케리는 스물넷, 토미 머톨라는 마흔다섯이었다. 떠오르는 팝스타와 음반사 대표의 결혼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의심했다.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의심은 현실이 됐다. 두 사람은 결혼 5년 만인 1998년 이혼했다. 머라이어 케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토미 머톨라는 그의 사생활과 커리어를 모조리 쥐고 통제하려 했다. 머라이어 케리는 단순한 노래쟁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노래를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음반을 제작할 때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기를 원하는 아티스트였다. 토미 머톨라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매니저이자 프로듀서로서 그는 머라이어 케리가 이미 성공한 방식대로 음반을 만들기를 원했다. 경력과 사생활을 모두 통제당하던 머라이어 케리는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 음악 역사상 가장 진흙탕 같은 이혼 소송이 이어졌다.

머라이어 케리, 결별 뒤 역경 딛고 재기

여기서부터 악몽이 시작된다. 토미 머톨라는 스스로 아티스트의 에고를 지닌 남자였다. 자신을 떠나며 소니뮤직으로부터도 탈출한 케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케리의 경력을 끝장내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2000년대 내내 돌았다. 토미 머톨라가 새로 발굴한 제니퍼 로페즈를 머라이어 케리의 경력을 짓밟을 무기로 썼다는 소문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소니뮤직을 나온 케리는 신곡을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제니퍼 로페즈가 같은 노래를 샘플링한 곡을 발매했다. 사람들은 토미 머톨라의 복수라 확신했다. 머라이어 케리는 2001년 한 인터뷰에서 제니퍼 로페즈에 대한 질문을 받자 “나는 그게 누군지 몰라요”라고 답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나름의 도발이자 무시였다.

2021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공연하는 제니퍼 로페즈. AP 연합뉴스

머라이어 케리의 경력은 한동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앨범은 연이어 실패했다. 토미 머톨라의 복수든 아니든 팝스타의 절정은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다행히도 머라이어 케리는 2005년 앨범 ‘디 이맨시페이션 오브 미미’(The Emancipation of Mimi)로 기사회생했다. 토미 머톨라가 바라던 정숙하고 우아한 팝을 버리고 힙합 음반을 만들면서 갈팡질팡하던 경력은 다시 불이 붙었다. 지금 머라이어 케리는 영원불멸의 생을 얻은 스타가 됐다. 토미 머톨라는 2003년 소니뮤직 대표에서 물러났다. 그는 2013년 자서전을 발표했다. 머라이어 케리에게 흠이 될 소리는 없었다. 그는 케리의 데모 테이프를 처음 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믿을 수 없는 에너지가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장 차를 돌리라고 했어요. 이건 아마도 일생일대 최고의 목소리일 거라고요.” 사람이 절정에서 내려와 늙어가다 보면 좋은 것만 기억하게 마련이다. 다만 머라이어 케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스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받더라도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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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것은 결국 악당의 이야기다. 아니다. 토미 머톨라는 악당인가? 인간을 악당과 선인으로 명확하게 나누는 건 히틀러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다. 사실 그의 눈과 귀가 없었다면 머라이어 케리는 스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통제를 일찌감치 벗어났다면 머라이어 케리는 개인으로도 아티스트로도 더 행복한 젊은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토미 머톨라와의 전쟁이 케리를 더욱 굉장한 아티스트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수많은 ‘그러나’가 수많은 가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지금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우리는 음악의 주인공이 아티스트라고 믿는다. 그건 절반의 진실일 것이다. 음악 업계는 일종의 공장이다. 음반사와 프로듀서와 매니저가 스타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그들을 파멸시키기도 하는 공장이다. 세상은 머라이어 케리로 넘치는 만큼 토미 머톨라로 넘친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공장에 가까운 케이(K)팝 세계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티스트일까, 아니면 기획사일까.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케이팝에 예민한 독자라면 이게 무슨 소린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짐작하는 독자는 ‘디토’를 외쳐주시길 바란다.

문화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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