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극장] 산소의 발견자는 라부아지에?

이창욱 기자 2024. 4.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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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부아지에. 과학동아 제공

앙투안 라부아지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근대 화학을 정립한 프랑스의 화학자다. 어떤 발견이 그를 화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만들었을까. 역사적 연구부터 프랑스 대혁명에 휘말려 짧은 생을 마치기까지 라부아지에의 삶을 좇아가본다.

과학동아 제공
과학동아 제공

많은 과학 교과서에서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라부아지에는 정말 화학의 '아버지'가 맞을까. 황당한 질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학 교과서는 뉴턴을, 다른 교과서는 라이프니츠를 미적분의 아버지로 모시기도 한다. 라부아지에의 활동 시기 화학에서 핵심적인 연구 주제였던 '산소'를 중심으로 화학의 '아버지'를 찾아보자.

산소에 대한 연구는 당대 여러 과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라부아지에가 산소의 발견자라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라부아지에 이전에 스웨덴의 화학자 카를 빌헬름 셸레가 산소의 발견을 보고한 바 있다.

셸레는 1772년 산소를 발견하고 2년 후인 1774년 라부아지에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산소를 발견한 기록을 담은 원고도 인쇄소의 실수로 출간되지 않아 셸레의 발견은 묻혔다.

그리하여 최초의 산소 발견자로 유명해진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영국의 목사이자 화학자 조셉 프리스틀리였다. 프리스틀리는 양조장의 맥주 발효통 속에서 '이산화탄소'를 발견해 탄산수를 만든 것으로 이미 유럽에서 유명했다.

1774년 그는 산화수은(Hg2O)을 가열해 이전에 알려진 적 없는 기체를 만들었다. 그는 이 공기 속에 쥐를 넣으니 더 오래 살았고 직접 마셔본 결과 상쾌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 기체가 연소 반응을 도와준다는 것을 확인한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에 '탈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로지스톤'은 태운다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물질에 잠복해서 그것이 탈 수 있게 돕고 반들반들한 표면을 갖게 하는 물질로 여겨졌다. 프리스틀리와 당대의 사람들은 연소나 산화라는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플로지스톤이라는 존재를 가정했다.

어떤 물질이 불에 타거나 녹이 슬면 플로지스톤을 방출한다고 여겼다. 즉 프리스틀리가 보기에 연소 반응을 도와준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빼앗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되는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라부아지에에게 알렸다. 라부아지에가 한 일은 이 새 기체의 특성을 연구해 '산소(oxygen)'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프리스틀리와 달리 연소와 산화 반응이 새로운 기체가 땔감이나 금속과 만나 생기는 반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새 기체가 산을 만드는 특성을 가진다고 여겼고 그래서 산(oxy)을 만든다(gen)는 뜻의 '산소(oxygen)'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라부아지에의 산소가 프리스틀리의 탈플로지스톤 공기를 제치고 화학의 주류 이론으로 올라서면서 라부아지에는 근대 화학이 성립되는 데 영향을 미친 셸레나 프리스틀리를 제치고 산소 연구의 권위자로 화학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게 됐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1788)'. Jacques-Louis David 제공
라부아지에의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조셉 프리스틀리의 기체 실험 장비. 대야와 거꾸로 세운 유리관에 물을 채우고 기체 방울을 모아서 실험을 수행했다. 대야 앞 유리병 안에 프리스틀리가 자신의 집에서 직접 잡은 쥐가 한 마리 있다. 프리스틀리는 쥐를 죽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실험 중 쥐가 질식해 죽을 지경이 되면 유리병을 열어 살려줬다고 한다. Wellcome Collection 제공
과학동아 제공

여기까지만 보면 산소 연구는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과 프리스틀리의 플로지스톤 이론의 경쟁의 역사이자 라부아지에가 옳았음이 증명되면서 근대 화학을 연 상징적 사건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과학적으로 라부아지에가 옳았고 프리스틀리는 틀렸기 때문에 경쟁에서 승리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은 오류투성이였다. 그중 결정적인 오류는 '산성을 만든다'는 산소라는 단어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소와 산성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산소가 들어있지 않은 산인 '염산(HCl)'을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이에 대해 라부아지에는 염산에 산소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우겼다.

여기서 그치면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약간의 결함이 있었고 라부아지에는 자존심이 강했던 인물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라부아지에가 박멸시켜 버린 플로지스톤 이론이 단순히 틀렸다고 없애버리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과학이었다는 점이다.

라부아지에가 프리스틀리의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오류라고 주장한 데에는 화학 반응 전후로 질량이 보존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었다. 플로지스톤 가설에 의하면 금속이 산화하면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 질량이 줄어야 한다. 라부아지에는 가열한 수은과 공기를 반응시켜 산화수은을 만든 후 반응 전과 후의 질량을 측정했다. 그 결과 산화수은의 질량이 오히려 늘어났음을 보였다.

라부아지에는 금속이 녹슬면서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플로지스톤 이론 체계를 뒤집기 시작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가 직접 그린 라부아지에의 실험실. 가장 오른쪽에서 마리가 실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실험 장비를 다루는 조수들이 여럿 보인다. Wellcome Collection 제공

물론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은 무게 증가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지만 이러한 훌륭함이 곧 플로지스톤 이론이 틀렸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리스틀리는 플로지스톤이 공기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워 겉보기 무게가 감소할 수 있다는 점 금속은 녹슬 때 플로지스톤을 방출하면서 물과 결합한다는 점을 들어 플로지스톤 이론이 여전히 연소 이후 무게의 증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라부아지에가 옳았다기엔 산소 이론에는 허점이 많았고 프리스틀리가 틀렸다기엔 플로지스톤 이론이 여전히 잘 설명하는 측면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플로지스톤 이론을 박멸시키는 캠페인을 전개했고 그 결과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만약 플로지스톤 이론이 일찍 퇴출당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과학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많은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주어진 온도에서 단위 입자당 추가되는 자유 에너지인 '화학포텐셜(chemical potential)'이나 '전자'와 유사하다고 지적해 왔다.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과학철학과 교수는 저서 '물은 H2O인가'에서 플로지스톤 이론이 살아남았다면 화학포텐셜이나 전자라는 개념도 훨씬 빨리 발견됐을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했다. 화학 반응을 에너지 변화로 산화와 환원을 산소가 아닌 전자의 방출과 흡수로 설명하는 현대 화학의 관점을 감안한다면 플로지스톤 이론이 충분히 두 개념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학동아 제공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의 말년은 모두 비참했다. 프랑스 혁명에 연루된 라부아지에는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됐고 모든 실험 장비와 기록들은 몰수됐다. 영국에서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프리스틀리의 집은 혁명을 반대하는 폭도들에 의해 파괴됐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리스틀리는 시골에서 조용히 신학 연구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이후에도 장비와 기록들이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아내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의 역할이 컸다. 14세에 라부아지에와 결혼한 마리는 언어 미술, 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이를 남편의 연구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왕립 병기창의 부속 건물에 거주하며 화학 실험을 했고 라부아지에를 위해 영어, 라틴어로 쓰인 외국 연구 자료를 번역했다. 심지어는 라부아지에 부부를 그려준 당대의 유명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그림을 배워 실험 과정을 그림으로 남겼다.

프랑스 혁명 이후 투옥됐다가 풀려난 마리는 라부아지에의 장비와 자료들을 돌려받고 그의 업적을 여러 기록으로 남겼다. 마리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실험실의 모습에는 라부아지에 부부, 그리고 장비들을 옮기고 조정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라부아지에는 일생 동안 70명 이상의 제작자들로부터 장비를 구입했다. 이들은 장비뿐만 아니라 과학적 아이디어도 제공했다. 라부아지에는 이들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는 그가 쓴 가장 중요한 두 논문에서 장비 제작자 플레이스와 세귄을 공동 저자 또는 제1 저자로 넣었다.

라부아지에의 경쟁자들이었던 프리스틀리, 셸레 역시 그들이 실험했던 주변 지역의 장비 제작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스티븐 섀핀 미국 하버드대 과학사학과 교수는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과학의 기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기술자'라 칭했다.

우리는 플로지스톤 이론과 산소 이론의 치열한 경합, 그리고 산소 이론의 최종적인 승리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론들이 만들어지고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데는 장비 제작자, 조수 등 수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다.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만큼이나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광택, 높은 전기 및 열전도성 등과 같은 금속의 공통 성질에 주목했던 플로지스톤 체계와 달리 라부아지에게 중요한 문제는 반응 전후의 질량 보존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이 멸종된 이후 에너지나 전자 개념이 등장하기까지 약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를 두고 “요절한 플로지스톤”이라 불렀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은 물론 훌륭한 과학이었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경쟁 이론을 물리침으로써 과학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회를 앗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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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4월호, [과학사 극장] 산소의 발견자는 라부아지에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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